멈추는 법이 없는 계절, 하늘과 산들에는 온통 가을로 가득하다. 푸르고 연약한 울음을 간직한 코스모스가 바람에 살살거리면 멀리 초등학교 뒷담 너머에 마른 플라타너스 잎 타는 연기가 솟아오를 것 같다. 가을은 나를 향해 다가올 준비가 됐으니 그대 마음 깊이 사랑에 취하고 발길에 그리움을 얹으라고 소리한다. 아직까지는 이 소중한 가을을 선물받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다.마음이 지나는 길가에 핀 들꽃은 오래간다. 그것은 꽃을 보는 사람이 사랑의 온도를 오래 기억하고 간직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꽃을 선물 받은 사람이 쉬이 버리지 못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그곳엔 내가 아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를 어려서부터 아재라고 불렀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밖에 많지 않지만, 그를 형이라 부를 수 없었다. 그는 내 아버지의 외사촌 동생이다. 아재는 나에게 잘 해줬다. 초등학교 시절 아재네 집에 놀러 가면 다락에 꽁꽁 싸매 놓은 꿀을 꺼내주기도 했고, 추운 겨울날 참새 사냥에 나를 데려가기도 했다.아재라는 말이 대중화되기 시작했을 때 '아재'라는 단어가 친숙하게 들렸던 것은 바로 이 아재 때문이다. 하지만 아재의 대중화된 이미지가 친절하고 멋진 신사가
내가 마련한 거제면 시골 오두막에서 보면 산달도가 호수 같은 바다 건너에 있다. 산봉우리가 3개인데 거기에 달이 뜬다고 산달이라 했다하니 달이 뜨지 않는 산봉우리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만, 그래도 그 소박함에 점수를 주고 싶다.닭을 몇 마리 키우다가 문득 아랫 동네에서 진돗개가 새끼를 몇 마리 낳았다는 말을 듣고 한 마리 얻어 와서 키우기 시작했다. 산달도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우리의 장치는 무엇인가? 동맹을 쉽게 버리거나 현실적 핵의 위협에 굴복한다는 것은 야만적 비인도적 삶을 살아도 괜찮다는 뜻이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북핵에 의한 핵 인질이 돼서는 안 된다. 특히 북한의 체제 내적 비인도적 참극에도 불구하고 핵 우위를 내세워 추호도 반성의 기미가 없는 절대체제를 그냥 바라볼 수는 없다.대한민국
경기도에 있을 때 얘기다. 우리 학교에서 학교 폭력이 발생했다. 여러 학생들이 연약하고 어리숙한 한 학생을 오랫동안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했다.견디다 못한 학생은 학교 인성부에 신고를 했고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가해 학생들이 줄줄이 교무실에 소환되었고 당연히 보호자인 부모들도 학교로 불려왔다.자식이 당한 것에 대해 화가 머리끝까지 난 피해자 학생의 부모는
'눈송이와 부딪쳐도 그대 상처 입으리'라는 신달자 시인의 문장을 참 좋아한다. 짧은 시구를 자꾸 되 뇌이다 보면 어느 순간 중심에서 멀어져 생긴 상처가 치료되는 느낌이다.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게 풀어 나가며 대중을 압도하는 동료를 보면 그 순간만큼은 그가 중심이고 나는 곁가지다. 말을 잘 하기도 하고 상대방의 반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옥상과 연결된다. 문을 열면 옥상이 바로 있으니 베란다라고 불러야 맞겠지만 그렇게 부르기엔 규모가 크다. 입주해 있는 건물이 아래층에서 보면 옥상이고, 우리 사무실에서 보면 베란다가 되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시골집 마당 정도 되는 넓은 옥상을 내 집 앞마당처럼 사용하고 있다.이곳 옥상에 작은 텃밭을 꾸며 놓았다. 텃밭이라고 말하기엔 규모가 작지만 고추·상추·오이·가지·방울토마토·들깨·방아까지 웬만한 구색은
베이비부머들 중 많은 사람이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이제 은퇴해 전원생활의 꿈을 안고 시골에 들어온다.나도 그 중 한 사람으로서 거제의 한적한 곳에 소박한 집과 텃밭을 마련하였고 이것저것 채소와 꽃나무들을 심어놓고 흐뭇했다.그런데 전원생활은 낭만 못지않게 어려움도 있다. 장마가 지나고 땡볕이 내리쬐면서 힘차게 자라는 잡초·바
중·미의 힘겨루기에 한국의 지정학적 위상은 그 위치에 못지않게 안보위국의 상황에 까지 내몰리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들의 내부적 분열과 미숙이 자초하는 위기감의 비중이 크다. 여기서 우리가 말아야 할 것은 자기비하와 상대적 불신과 이념의 편파성 등이 아닐까?남북한이 한민족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을 살아가는 데는 그 동안의 역사적 실상과 허상이 공존할
여름을 맞이하여 부엌 정리를 해야겠다 싶어 여기저기 정리하다보니 유기 그릇 몇 점이 눈에 띄었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 집에서 제사를 지낼 때면 온 집안 여인네들이 모여 유기그릇, 일명 놋그릇을 마당에 펼쳐놓고 짚을 수세미 삼아 연탄재를 묻혀 그릇을 닦던 것이 떠올랐다.시커멓게 녹으로 얼룩져 있던 놋그릇이 수세미질 몇 번으로 황금색으로 반짝거리는 것이 얼마
꽃게가 뒤집혀졌다. 바닷물 고인 둥근 고무통을 탈출한 꽃게가 시장바닥에 뒤집혀져 있다. 고무통 넘치는 바닷물이나, 가까운 항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콘크리트 바닥이어서 그냥 누워 바동거리고 있다.하얀 뱃살에는 등 주름을 당겨 바늘로 꿰맨 듯 구겨 오므렸고, 파도와 갯바위에 등을 곱게 쓸고 갈아내어 등이 꽃처럼 피어나는 동안 뱃속은
초등학교 4학년 이후로 딸은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가 학원에 다니는 걸 원치 않았고 나 역시 아이를 학원으로 내 몰기 싫었다. 어렸을 때는 공부보다는 마음껏 뛰어 노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나름대로의 교육철학도 가지고 있었다.모든 것이 대학입시에 맞춰져 있고 대학 진학이 지상 최대의 목표가 되어버린 이상한 교육 제도에 나까지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일을 할 때 마음이 편하지 않은 이유는 결과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일을 할 때는 목표가 달성되기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원하는 대로 일이 다 이뤄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이뤄지면 기뻐하고 이뤄지지 않으면 괴로워 한다.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는 게 사실은 정상이니, 누구나 원하는 대로 이뤄진다면 세상은 엉망이 될 것이다. 원하는 게 이뤄
진취와 성장과 발전의 핵심 동력은 물질을 아우른 정신에 있다. 앞이 캄캄할 때도 때로는 어둠을 뚫은 광명 속에서도 심저에 걸어둔 우리들의 정신은 무엇인가?한 민족 역사의 심혼과 나아가서 세계 공통의 맥락을 짚어보더라도 근 현대사의 3.1정신, 대한민국 헌법정신, 산업화와 민주화 정신 등이 드디어 자유민주주의의 시대정신으로 꽃피고 있음이 우리들의 현실이다.그
옛날에 어떤 한 아가씨가 있었다. 그녀는 사막에 사는 한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 청년과 결혼하여 사막에 살게 되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사랑 때문에 주변 환경이 보이지 않았다.황량하고 외로운 사막이든, 뜨거운 모래바람이 불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는 것이 그녀의 눈과 귀를 막았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드넓은 사막이 보이기 시작
틈 없던 틈이 생겼다. 틈이라고는 없던 콘크리트 바닥, 발 뻗을 곳을 찾은 민들레가 환하다. 어쩌다가 바닥은 꽃씨 내릴 틈을 허락했을까? 수분 없는 틈을 아랑곳 않는 민들레도, 마음 내릴 자리를 내어 준 틈도 미소로 서로 기웃거린다.바람에 이끌려 떠도는 씨앗을 발견한 바닥이 먼저 자신의 몸 한 쪽을 내었으리라. 불편하고 불안한 사이를 내어주는 동안 씨앗은
나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어 진다. 아이들은 나를 아버지라 부르고 아내는 자기라고 부른다. 자기라는 호칭 속에는 여보, 남편, 애들 아버지라는 의미가 함께 녹아 있다. 아이들에게 나는 아버지가 되지만,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게 나는 자식이 된다. 모두 나를 구성하는 이름들이다.가정에서의 호칭이 본질적인 것이라면 사회에서 나를 호칭하는 것들은 외양과 관련돼 있
공자가 천하를 주유할 때 채나라 국경을 지나다가 뽕을 따는 두 여인을 보았는데 동쪽에서 뽕 따는 여인은 얼굴이 예쁜데 서쪽에서 뽕을 따는 여인은 곰보처럼 얽었다. 공자가 농을 하기를 "東枝璞 西枝縛(동지박 서지박), 동쪽 가지는 구슬 박, 서쪽 가지는 얽을 박…" 서쪽 여인이 공자를 힐끗 보더니 이렇게 대꾸한다.'乾脣露
청년의 어깨가 처져 있다. 희망조차 없이 무너지고 있다. 사회 전반에 드리운 비극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이해 그 동안의 냉엄한 반성과 참회로 조금은 나아졌으리라고 생각하는 삶의 불안이 여러 생활환경에서도 커지고 있다.지난해 5월28일 서울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공 19세 김모 청년의 순직은 우리사회에 올바른 청산작업이 무엇이 돼야
해마다 봄이 오면 내가 나에게 하는 선물이 꽃이다. 노란 후루지아 한 묶음을 일부러 사서 책상 옆이나 집 거실 한 자리를 내어 준다. 아무도 받을 사람 없는 꽃을 사서 가슴에 안았다가 등 뒤로 숨겼다가 하는 잠깐의 의식으로 나는 봄을 맞이한다. 이십년 넘게 이렇게 하고 있으니 피었다가 사라진 꽃들로 마음이 환하다. 처음에는 향이 좋아서 샀다가 나중에는 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