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 김계수 거제시외식업지부 사무국장

해마다 봄이 오면 내가 나에게 하는 선물이 꽃이다. 노란 후루지아 한 묶음을 일부러 사서 책상 옆이나 집 거실 한 자리를 내어 준다. 아무도 받을 사람 없는 꽃을 사서 가슴에 안았다가 등 뒤로 숨겼다가 하는 잠깐의 의식으로 나는 봄을 맞이한다. 이십년 넘게 이렇게 하고 있으니 피었다가 사라진 꽃들로 마음이 환하다. 처음에는 향이 좋아서 샀다가 나중에는 스스로에게 던져주는 '소멸'을 허락하는 의식이 돼버렸다.

4월이 되면 강 건너 산이나 들에서 아무렇게나 피는 복사꽃은 향기보다는 가슴 몽클한 그리움을 가득 안겨준다. 줄지어 자라지도 않으면서 여기 저기 알맞게 다정한 강 건너에 핀 저 꽃은 누가 심었을까 궁금해 한 적이 있다. 산이 시작되는 숲길에 눈길 하나에도 사라질 것 같은 제비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무덤덤한 은행나무 가로수 밑동 아래 둘러 핀 민들레나 큰개불알꽃은 또 어떤가.

말라붙은 누룽지처럼 굳은 맨 땅에 숱한 발자국을 부수고 핀 작은 미소는 많은 사람들의 눈 속에 먼저 담긴다. 하지만 그 많던 꽃들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떨어지고 사라진다. 더 이상 꽃을 달지 않은 풀·나무들은 사람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어떤 자리를 구별하지 않고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서 아름답다는 감정을 가지는 것은 소멸이 자연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피어 있는 꽃에게 아름답다는 감정이 들고 스스로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을까 싶다. 꽃이 피어 꽃이 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꽃이 피고 소멸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과정이다.

소멸은 또 다른 축복이고 불멸은 재앙이다. 사람이 오래 산다는 것은 축복할 일이겠지만, 단지 살아 있다는 것 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껍데기일 뿐이라면 존재는 고통이다.

간신히 숨 쉬고 있다고 과연 살아 있는 것인가. 소멸하지 않는 생명 때문에, 또 그런 욕망 때문에 우주에 미치는 해악은 얼마나 많은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이를테면 돈이나 권력, 명예 이런 것들을 소멸시키지 못하고 불멸할 것처럼 쌓고 욕심을 내면 재앙이 있기 마련이다. 다행스럽게 인간은 소멸을 심성으로 이루기도 하고 새롭게 창조해내는 능력을 가졌다.

이를테면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쓴다거나 꽃을 보고 시를 쓰기도 하는데,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해 스스로 소멸시키는 사람의 행위야 말로 봄에 피는 꽃처럼 가볍고 작고 아름답다.

꽃 피우는 것에 실패한 나무와 풀들처럼 생에 실패한 사람들도 허다하다. 피지 못한 꽃 몽우리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기만 한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썩고 만다. 그러나 인생에 실패라는 것은 그 구분과 개념을 명확하게 정해 놓은 사회적 약속은 없다. 퇴행하고 있는 사회가 정신보다는 '양'을 성공의 잣대로 삼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정신은 제 때 피어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인생가지에 매달려 말라가고 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주식이나 집값이 얼마 올랐는지가 아니라, 내 주변에 핀 민들레꽃을 자주 바라보아야 아름답지 않을까. 월급이 얼마나 올랐고 누가 돈벼락을 맞았다는 관심 말고 어느 봄날에 받을 사람 아무도 없는 꽃다발 가슴에 안고 뜀걸음 가져보는 일도 좋겠다.

꽃이 지듯이 나도 소멸할 것이다. 소멸하는 자신을 위해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고 정신으로 창조하고 평가하고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온갖 물질들에게는 소멸을 허락하는 가볍고 아름다운 사람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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