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 김계수 칼럼위원

'눈송이와 부딪쳐도 그대 상처 입으리'라는 신달자 시인의 문장을 참 좋아한다. 짧은 시구를 자꾸 되 뇌이다 보면 어느 순간 중심에서 멀어져 생긴 상처가 치료되는 느낌이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게 풀어 나가며 대중을 압도하는 동료를 보면 그 순간만큼은 그가 중심이고 나는 곁가지다. 말을 잘 하기도 하고 상대방의 반응에도 격하게 호응을 해가며 중심에 서는 동료를 보면 나는 더 진지해지며 상처 받는다.

설사 얼굴에 미소까지 만들어 한마디를 거드는 순간 화젯거리는 이미 달라져 있다. 적절한 끼어들기를 놓친 대화에 돌아오는 반응은 얼마나 쑥스럽던지. 대화 내내 중심에 서기 위해 머리를 굴러가며 겨우 한마디 툭 던지고서야 스스로 위안이 된다.

나는 얼마나 중심에 서 있을까. 가정·조직·사회에서 부류가 모여 대화를 하거나 일을 추진할 때 중심적인 인물이 아니라도 삶에 만족할 수 있을까. 곁가지라고 생각돼 상처받은 일이 왜 없을까. 하물며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도 더러는 늪이 되고 숲이 돼 발목 잡히는 일이 허다한데, 일상에서는 더욱 다양하고 깊고 오래 갈 상처가 많을 것이다.

유독 사람처럼 중심에 서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무리가 또 있을까 싶다. 조직에서는 고의적으로 한 구성원을 중심에서 밀어내는 방법으로 자리를 정리하기도 한다. 생각하면 무자비한 일이다.

그렇지만 조직에서는 역할과 존재의 중심에 서야만 지위나 권력을 쟁취 했다고 믿고 인정받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중심을 잡기 위한 눈치전쟁은 치열하다. 눈치나 능력이 모자라면 돈이라도 잘 써야 그마나 중심에 섰다는 착각 속에 잠시 행복할 터이다.

업무능력이나 마음의 상태와 상관없이 중심에 서지 못하면 존재를 부정하고 싶거나 뒤쳐졌다고 느끼게 되는 이런 조직적이고 악의적인 현상은 주관을 철저히 객관화시켜 버리는 잘못된 사회 관념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배가 후배에게 상담을 해 주거나 상사의 대화·지시 중 가장 큰 오류는 '객관적으로 말해서…'라는 말이다. 조직의 상사가 가진 경험이나 지식은 이미 객관적 사실과 진리가 돼 있으니 무조건 따르라는 것은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다. 사람이 저마다 다 다른데 어떻게 서로에게 객관적일 수 있겠는가.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도 함부로 이런 '객관적'이란 단어를 쓸 수 없다.

특히 요즘처럼 많은 관련정보를 어느 곳 어느 때라도 검색할 수 있는 시대에서는 말이다. 중심에 섰다고 믿는 사람들의 그 허풍 당당한 '객관적'이라는 말도 사실은 지극히 주관적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객관적이란 말은 오류다. 누구든지 한 번도 너와 나의 입장에 설 완벽한 기회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오랜기간 지내오면서 사회적 금기와 약속의 바탕에서 만들어진 최대의 협상안일 뿐이다.

모든 존재의 중심은 생겨났다 사라진다. 모든 것은 죽어서 중심에서 사라지고 모든 것은 다시 중심으로 소생한다.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반복하는 것처럼 존재의 중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동료들 앞에서 재미있고 화려하게 언변을 늘어놓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의 중심은 고스란히 내게 남아 있을 것을 믿는다.

우리 모두는 강하고 또 약하다. 마음에 베이는 상처는 희한하게 다 나았다 싶어도 어느 순간 다시 부르트고, 심한 상처인 것도 한 순간 나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람이 가진 가장 선한 무기는 마음이며, 악한 것도 마음이니 앞으로도 숱하게 다쳤다가 아물고 하는 상처들은 다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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