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우 수필가
이동우 수필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그곳엔 내가 아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를 어려서부터 아재라고 불렀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밖에 많지 않지만, 그를 형이라 부를 수 없었다. 그는 내 아버지의 외사촌 동생이다. 아재는 나에게 잘 해줬다. 초등학교 시절 아재네 집에 놀러 가면 다락에 꽁꽁 싸매 놓은 꿀을 꺼내주기도 했고, 추운 겨울날 참새 사냥에 나를 데려가기도 했다.

아재라는 말이 대중화되기 시작했을 때 '아재'라는 단어가 친숙하게 들렸던 것은 바로 이 아재 때문이다. 하지만 아재의 대중화된 이미지가 친절하고 멋진 신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터넷과 SNS 등을 통해 투영되는 아재의 이미지가 온통 부정적인 것 투성이었다. 거만하고 훈계하고 개념 없고 시류에 뒤처지고 잘난체 하고 잔소리꾼이고.

아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어떻게 형성됐을까? 여러 사람들의 눈에 중년 남성들의 부적절한 모습이 비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중년 남성들의 부적절한 모습들이 쌓이고 이것들이 SNS 등을 통해 유통되면서 아재의 이미지가 부정적인 것으로 고착화되지 않았을까 유추해 본다.

이 시대의 아재들이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이미지로 비쳐지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집에서는 서열 4위로 밀려났고 회사에서는 상사한테 시달리고 후배에게 치인다. 자존심은 버린 지 오래이다. 능력이 떨어지고 혼자만 뒤처져 있는 것 같아 늘 불안하다. 아재들도 다른 세대와 마찬가지로 치열한 경쟁사회의 희생양에 불과하다.

나이 많은 중년의 남자를 아재라고 한다면 나는 분명 아재의 범주에 들어간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아재인 나는 아재소리를 들을 때마다 위축된다. 미디어에서 부정적인 아재의 이미지가 보일 때 마다 행동이 조심스러워 지고 자신감은 떨어진다. 아재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당신의 아재지수는?'라는 식의 인터넷에 떠도는 문항을 남몰래 체크해 보기도 한다.

얼마 전 모 신문에서 아재에 대해 쓴 칼럼을 읽었다. 필자의 경험담을 쓴 것이나 글의 내용에 대해 달리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중년의 남성 대다수가 부정적인 이미지로 비쳐지는 듯한 모습은 과히 좋지 않았다.아재라는 단어는 세대 간의 소통을 단절시킨다. 아재들은 젊은 세대에서 다가서기 두렵고 젊은 세대들은 아재와 가깝게 지내려 하지 않는다. 특정세대를 아재로 지칭하는 것은 그래서 바람직하지 않다.

아재들도 꿈을 꾼다. 되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한 꿈들, 사회생활을 하면서 새롭게 갖게 된 꿈을 꾼다.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도 노력한다. 아재들에겐 꿈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이다. 세상의 모든 아재들은 아직도 꿈꾸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고자 했던 젊은 시절의 꿈도 아직 버리지 않고 있다. 젊은 시절에 비해 열정이 부족할 뿐이다. 아재들의 젊은 시절도 지금이 젊은 세대들처럼 치열했다. 독재와 폭압이라는 사슬의 무게가 그 위에 더해졌다. 그러니 아재들의 건강한 잔소리는 치열한 삶을 먼저 살아온 선배가 후배에게 들려주는 격려의 소리라 여기고 넓은 마음으로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쁜 아재들보다 긍정적으로 좋은 아재들이 더 많다는 사실도 알아줬으면 한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나쁜 모습으로 비쳐 질 때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좋은 모습으로 비쳐졌을 때가 더 많다고 자부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모습마저도 아재스럽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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