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꽃게가 뒤집혀졌다. 바닷물 고인 둥근 고무통을 탈출한 꽃게가 시장바닥에 뒤집혀져 있다. 고무통 넘치는 바닷물이나, 가까운 항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콘크리트 바닥이어서 그냥 누워 바동거리고 있다.
하얀 뱃살에는 등 주름을 당겨 바늘로 꿰맨 듯 구겨 오므렸고, 파도와 갯바위에 등을 곱게 쓸고 갈아내어 등이 꽃처럼 피어나는 동안 뱃속은 허옇게 바늘 상처로 곪아가고 있었으리라. 위엄있어 보이는 집게발도 엎어져 있을 때는 허공만 가를 뿐이다.
허접한 속살을 보여주는 부끄러움도 그렇지만, 꽃처럼 화려하고 짠 바닷물과 거센 파도에도 무탈하게 견뎌온 단단한 등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더 분하고 안타까워서인지 입에서는 거품까지 게워내고 있다.
"나의 아름다움은 뱃살이 아니라 등이요, 누가 나를 일으켜 나의 등을 봐 주시오."
꽃게의 행동과 소리는 잦아들고 시장 흥정의 외침은 커져간다. 화려한 등을 보이고 싶은 꽃게쯤이야 시장 바닥에서는 그래도 된다는 듯, 말이나 글이나 함부로 갈겨쓰는 사람들 웅성이며 지나가는 동안 시장 바닥은 조용해졌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어쨌든 꽃게는 등에 잘 그려진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것으로 보인다. 화려한 옷을 뽐내는 길거리 쇼윈도 마네킹 뒤쪽에는 무수한 바늘이 박혀 고정되어 있듯이 자신의 화려함을 보여주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허접한 뒷모습을 보이는 부끄러움이 꽤 컸을 것이다.
누구는 '허영심'이라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삶에 있어 절대의 자존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시장에서 발견한 뒤집혀진 꽃게를 바라보면서 아주 짧은 시간 삶이 우리에게 허락한 허영(虛榮)은 어디까지일까를 고민했다.
'최상'과 '최고'에 지친 삶이 우리에게 허락한 것은 단지 고통의 연속이라면 꽃게의 화려한 등은 생에 지친 사람들에게 견딜만한 힘이 되는 허영(虛榮) 같다는 생각 말이다. 우리는 자신을 열심히 갈고 닦으면서 최상과 최고를 위해 바동거리고 살지만 인생이라는 시장 바닥에 내 던져지면 세상을 이루는 그저 작은 구색일 뿐, 애초부터 위로와 격려, 사랑, 행복, 긍지라는 말들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허영은 내면의 허약함에서 오고 내면의 튼튼함에서 긍지가 온다. 화려한 장식을 좋아하고 주변의 힘 있는 사람들과 인맥을 내세워 자신을 보상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을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라 한다.
그럼에도 허영심을 그 사람과 분리해보면 곧바로 상처가 보인다. 긍지 강한 사람도 가지고 있을법한 그런 흔한 상처. 상처받은 허영심은 알면서도 속아주고 싶다. 속아주지 않고 따지고 들면 파탄이 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장바닥의 꽃게처럼 불편한 내면을 감추고 뒤집혀지지 않고 살기위해 바둥거리는 사람의 허영에 무한한 온정을 주고 싶은 마음이다. 상처 난 허영심을 건드리게 되면 즐거움이 사라지고 뒤집혀져서 다시 일어 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그리 대단한 선(善)도 없고 죽일만한 악(惡)이란 것도 사실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허약한 사람의 허영에 대해 위로를 해준다 해서 내가 허영심에 빠지고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위로해 주는 사람은 상처를 받아도 또 다른 긍지가 자라날 것을 믿는다.
나는 매일 얼마나 진심뿐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왔던가 생각하면 뒤집혀진 꽃게 신세가 된 부끄러운 기분이다. 같은 공간에 함께 사는 사람이 내어 놓은 약간의 허영에 대한 위로가 곧 자신을 위한 격려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