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아버지를 보았다. 잘 살고 있느냐? 고 물어보신다.엄마한테 꿈에 아버지를 보았다며 안부 전화 드렸다. 뇌졸중으로 몸이 불편하신 엄마는 아침마다 아버지 영정을 보면서 "잘 주무셨소?"라는 말로 하루를 시작하신다. 동생과 살고 계신 엄마는 동생이 직장에 나가고 나면 하루 종일 혼자 지내신다. 적적하지 않게 반려견을 분양해 드릴려고 했으나 엄마는 동물은 싫다고 하셨다.아버지는 5년 전 심한 감기로 입원하였는데 새벽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가족에게는 어려운 분이셨다. 엄하고 규칙을 강조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어렸을 적에 은행나무는 가끔 봤지만, 어찌된 까닭인지 그 열매는 기억에 없다. 그러던 은행을 육지에 나가서 그것도 제대를 하고 한참 뒤에야 그 열매를 맛 본 것으로 짐작되니 지금 내가 생각해도 약간 의아할 정도다.쌉싸래한 향이 베여있는 그 고소한 맛을 처음 만난 것은 아마도 맥주집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얇은 갈색의 속껍질이 가끔은 붙어있는 그 푸르뎅뎅하니 말랑말랑한 구운 알갱이를 식기 전에 한두 알 이쑤시개로 찍어 먹는 맛이라니…, 그 알갱이의 바깥에 하얗고 딱딱한 껍질이 따로 있어 견과류에 들어간다는 것도 나중에 알
"지리산 가자.""지리산?"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친구들은 지리산에 가자고 했다. 산이라고는 동네 뒷산에도 올라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산도 그냥 보통의 낮은 산이 아니라 엄청 오르기 힘들다는 지리산이고 보니 쉽게 승낙하기 어려웠다.오월의 지리산은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하늘정원을 방불케 한다는 달콤한 꼬임과 대학생활의 이야깃거리를 하나쯤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친구들의 설득에 같이 가기로 했다. 산에 오르는 것이 제 아무리 힘들다 해도 하루정도야 견디지 못하랴 싶었다.약속된 날 아침 진주 시외버스
그가 오는 소리이다. 지하철을 일상처럼 오가는 눈먼 사람의 소리가 분명하다. 하모니카를 목에 건 채 한 손에는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동전바구니를 든 그가 한발 한발 내딛으며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어떻게 할 것인가. 지하철에서 그를 만난 것도 벌써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한 번도 온정을 베푼 적이 없다. 지갑을 만지작거리다가도 막상 그가 가까워지는 순간에는 동작을 멈추었다. 동전 한 닢조차 건넬 용기가 없었던 나는 멀쩡한 눈을 하고서도 눈을 감아버려야 했다.그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오늘은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파헤치고 부수고 깨고 난리도 아니다. 포클레인에 동강나는 고목이며 짓밟힌 화초들의 울음 소리가 귀를 찢는다. 주민들이 모여 담소하던 곳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이곳을 지날 때면 흐뭇했었다. 아름드리나무가 듬직하고 철철이 꽃들이 화사했다. 그늘속에 나무탁자와 돌의자가 오순도순 정다웠다. 아파트답지 않은 야트막한 기와담장도 운치 있었다. 어른과 아이들·이웃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차를 나누며 깔깔댔다. 놀이도 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가끔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돌 의자 하나를 슬그머니 차지했다. 한나절 한유하다 객이 아닌
가정 형편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집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바랑을 매고 탁발 온 스님 한 분이 오신 것이다. 그때 그는 곡식을 시주받았는데도 바로 가지 않고 나머지 염불을 끝까지 하고 돌아섰다. 그때 어머님이 궁금해 "그래가지고 하루에 몇 집이나 돌겠수?"라고 하자, 스님은 "누가 뭐래도 부처님의 가르침 대로 탁발을 한다"는 말을 남겼다. 불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그 말에 감동한 나머지 스님이 머무는 절의 신도가 됐다.그로부터 스님과의 연은 한 식구(食口)처럼 이어졌다. 스님의 배려로 뜻밖에도 나는 통영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
나는 야생화를 좋아한다. 가꾸어서 피는 화려한 화초보다 수더분한 들꽃이 좋다. 야생화 중에서도 동강할미꽃이나 변산바람꽃, 복주머니난(蘭)과 같이 귀하게 취급 받는 꽃들은 흔치 않아서인지 보기도 어렵거니와 이름조차 낯설다.그에 비해 쑥부쟁이와 구절초, 심지어는 개망초는 계절따라 한적한 길섶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들꽃이다. 떨기바람에도 온 몸을 간질어대는 여린 꽃들의 정감어린 몸짓이 좋은데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자운영이다.어렸을 때 들녘에 지천으로 보이던 풀이었는데 요즈음은 영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라진 풀은 아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귀걸이를 깜빡한 것이다. 부랴부랴 손에 쥐고 나오니, 간발의 차이로 내려가고 있다. 누군가의 호출을 받은 듯 가다 서다를 되풀이하다 급기야 문이 열린다.종종걸음으로 들어가니, 아무도 없다. 거울 속의 '나'와 마주하고 있다. 양쪽 벽면이 거울로 둘러싸여 호기를 만난 느낌이다. 이를 말하듯 손아귀에 놓인 귀걸이가 더욱 반짝인다. 습관처럼 그것을 귓불에다 갖다 대고 귀걸이 자리를 찾는다. 그러는 사이, 다시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온다. 엉겁결에 고개를 돌린 나는 귓불을 사정
연어의 모천회귀처럼 나도 모태인 고향에 돌아왔다. 약관의 나이에 고향을 떠났다가 환갑을 몇 해 앞두고 돌아왔으니 어언 40년만의 귀향이다.가난했던 어린시절, "왜 하필이면 이 답답한 섬 구석에 태어나 이 고생을 할까?" 하고 내 고향에 대해 적잖은 불만을 가진 적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런 불만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쁨과 즐거움 보다는 고통과 눈물, 한숨이 더 많았던 곳이 내 고향 거제읍내였으니 말이다. 그랬기에 나는 어떻게 하면 이 좁디좁은 섬을 탈출해 드넓은 대처로 나가 마음껏 활개치며 살 수 있을까를 고민했었다.머
포세이돈의 진노가 시작됐다. 긴 머리카락과 수염을 날리며 삼지창을 들고 날뛰는 성미 까다로운 바다의 신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대소병도를 집어 삼킬 듯이 설치기 시작한다. 태풍 차바는 10월에 온 태풍 가운데는 가장 강력하다는 뉴스보도가 결코 허풍만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한바다로부터 밀려온 파도는 엄청난 소리를 내며 섬에 와 부딪혀 포말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장관이다. 나라는 온통 태풍 때문에 야단법석인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놀랍게도 나는 자연의 무서운 폭력을 감상하고 있었다.내 나이 열여덟 살 적에
박자를 또 놓친다. 서둘러 다음 음표를 찾아 연주하지만 소리가 다르다. 서두르다 코드를 잘못 짚은 탓이다. 연주를 멈추고 다음 마디를 준비하며 잠시 기다려야 하는데 조급증이 일어 서두른 게 화근이다.한 번 틀리고 난 후 다른 사람 박자에 신경 쓰느라 이번에는 엉뚱한 코드를 짚어 다른 소리를 내고 말았다. 서둘러 코드를 바꾸지만 이미 늦었다. 박자도 코드도
아침 산책길에 몇 일째 눈에 띄는 장면이다. 길 한편에 개 세마리가 나란히 걷다가 건널목을 건널 땐 가만히 기다린다. 그러다 신호가 바뀌면 줄지어 건너가는 것도 재밌다. 어쩌다 미처 건너지 못한 나머지가 있으면 건너 올 때까지 한쪽에 자리 잡고 아예 철석 드러눕는다.그런 장면들을 지켜보며 어쩌면 동물의 세계를 더 깊이 알아도 좋을 듯 깊은 생각에 빠질 때가
엉겁결에 그의 우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내리치는 빗방울을 더는 피할 길이 없었다. 우리는 건널목을 지나 지하철역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그는 한때 우리 집앞 과일장수였고, 나는 그의 단골손님이었다. 내가 과일을 사러갈 때마다 구수한 입담을 늘어놓던 그는 한두 개씩 덤으로 얹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맛에 길들여진 나는 다른가게는 좀처럼 기웃거리지
거제시 하청면 유계리 앵산 중턱에 경남 4대 사찰의 하나였던 북사가 있었다. 앵산은 하청면과 연초면 신현읍 일부가 접해 있는 산이다 높이 507m로 고현쪽은 암반으로 형성돼 있고 하청 쪽은 토심이 좋다.꾀꼬리가 북쪽으로 향해 날라 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이산을 꾀꼬리 앵(鶯), 앵산이라 한다. 앵산은 연초면과 하청면을 경계로 한다. 산도 앞과 뒤가
사는 곳에 따라 신분이 달라진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란 말이 있다.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가치가 다르다. 사람 사는 가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는 몰라도 누구나 편안하게 잘 사는 것을 갈구한다. 잘 산다는 것은 경제가 윤택하고 생활문화가 발달하고 교육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까? 옛날에는 환갑을
이 땅에 다시 있어서 안 될 민족의 비극을 안겨준 6.25전쟁, 생각만 해도 몸서리 쳐 진다.전쟁이란 미명하에 구국의 일념으로 초개같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청년들, 사랑하는 아들들이 가족과 정든 집을 떠나 낯선 산야에서 홀연히 이슬로 사라져야 했던 전쟁, 팔다리를 잃은 많은 사상자와 부모 잃은 고아들이 수두룩했으며 마을이 피폐하고 국토가 피폐하고 1000여
강 코디네이터는 익숙하게 군지상네 집으로 들어서서 전혀 어색하지 않게 일행들을 안내했다. 마치 자기 집처럼 편안해 보였다.곧 정감 어린 환영회가 시작됐다. 한국에서 간 12명의 연수단은 동네 사람들이 분담해 요리한 상차림을 보며 흥감한 말들을 쏟아냈다.흔히 일본 사람들은 음식을 접시에 발라놓은 것처럼 쪼금씩 차린다는 말은 무색하게 됐다. 유부초밥이나 김밥도
보리가 익기 전 식량이 모자라 어렵게 지냈던 시절이 있었다. 이 고비를 넘기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죽을 힘을 다해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그 고개를 '보릿고개'라 한다.1950년 한국전쟁으로 온통 폐허가 됐다. 하늘이 노했던지 가뭄과 홍수가 이어져 잦은 흉년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가을농사가 잘돼도 겨울나기가 어려웠다. 하루에 한 끼 죽
전남 완도군 청산도에서 느림우체통을 처음 만났다. 편지를 넣으면 1년 뒤에나 배달된다는 '느림'에 대한 안내가 쓰여 있었다.내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탓인지 그전에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던 우체통이라 무척 흥미로웠다. '슬로시티'라고 이름 붙여진 청산도와 딱 어울리는 느림우체통 앞을 빨리 뜨기가 쉽지 않았다.3월 초인데 겨울바람처
홍도는 갈매기 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통영군에 속해 있지만, 거제도에서 가까운 남쪽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해금강과 이웃하고 있는데, 수평선에 조개를 엎어 놓은 것 같다. 이 섬은 갈매기 서식지다. 홍도는 푸른 바다에 우뚝 솟은 돌산이 천태만상으로 형형색색의 모양을 하고 있다. 돌 틈 사이에 풀이 자라고 그 풀숲에 갈매기는 보금자리를 틀고 산다.햇살이 돋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