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자의 변(辯)
위선자의 변(辯)
  • 서한숙 수필가
  • 승인 2017.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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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숙 거제문인협회 회장
서한숙 거제문인협회 회장

그가 오는 소리이다. 지하철을 일상처럼 오가는 눈먼 사람의 소리가 분명하다. 하모니카를 목에 건 채 한 손에는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동전바구니를 든 그가 한발 한발 내딛으며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지하철에서 그를 만난 것도 벌써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한 번도 온정을 베푼 적이 없다. 지갑을 만지작거리다가도 막상 그가 가까워지는 순간에는 동작을 멈추었다. 동전 한 닢조차 건넬 용기가 없었던 나는 멀쩡한 눈을 하고서도 눈을 감아버려야 했다.

그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오늘은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길만 살짝 틔워주고 돌아서는 사람들처럼 자신을 감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목적지가 아닌 곳에서는 내릴 수가 없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 나는 그의 하모니카소리를 따라 마음을 열고 지갑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도착지를 알리는 안내방송과 함께 지하철 문이 활짝 열렸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붐비던 지하철 안은 전혀 다른 소리로 들끓었다. 추억의 골든 팝송, '예스터데이'가 고막을 울리며 한순간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 너머로 음반을 판매하는 한 젊은이가 보였다.

그는 지하철 문 앞에다 시디플레이어를 실은 손수레를 세워놓고 거침없이 음악을 틀어댔다. 그 소리의 파장이 너무 커서 눈먼 사람의 하모니카 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았다. 소리를 높일 대로 높인 그는 사람들의 감성을 제멋대로 자극했다. 고조될 즈음엔 재빨리 다른 음악으로 바꾸어 버리는 상술을 펼쳤다. 그러다가 '추억의 골든 팝송' 세트를 '단돈 만원'에 드리겠다고 하면서 사람들 틈새로 자유로이 비집고 다녔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그의 손에는 만원짜리 지폐가 서넛 쥐어져 있었다. 눈먼 사람의 하모니카 소리에는 꿈쩍도 하지 않던 사람의 마음을 시디플레이어가 거뜬히 움직인 것이다. 세상은 아직도 큰소리가 지배한다는 듯 지폐 한 장을 용케 끄집어내게 한 그의 상술이 놀라웠다. 지하철에서 간간이 음반을 판매하는 사람은 보았지만 이렇듯 소리와 소리가 서로 맞닥뜨린 적은 없었던 터이다.

그러는 사이에 눈먼 사람은 저만치 멀어져갔다. 내가 '예스터데이(?)'에 빠져 중심을 잃었을 때, 그도 중심을 잃은 듯이 잠시 휘청거렸다. 생계의 수단인 하모니카 소리를 잠식당해 그만 발을 헛짚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칸칸이 지하철문을 열고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나는 눈먼 사람의 하모니카 소리를 공짜로 들었다. 눈이 멀쩡한 사람들을 의식해 멀쩡한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추억의 골든 팝송을 핑계로 한눈을 팔다가 그 순간을 살짝 비껴간 것이다. 생명줄과 같은 하모니카 소리가 허물어지고나서야 그의 연주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백기처럼 말간 눈동자를 떠올리고 그를 생각한다.

어찌하랴. 채무자의 굴레를 벗을 수가 없다. 힘겹게 늘어뜨린 가방끈이 무색한 느낌이다. 목적지를 알리는 안내방송을 듣고 엉겁결에 승차권을 찾던 나는 멈칫한다. 열린 지갑 틈새로 빠끔 고개를 내민 동전들이 일제히 나를 겨냥하고 있다. 마치 내 얄팍한 동정심을 두고 무어라 나무라는 눈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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