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지 수필가

▲ 황광지 수필가

전남 완도군 청산도에서 느림우체통을 처음 만났다. 편지를 넣으면 1년 뒤에나 배달된다는 '느림'에 대한 안내가 쓰여 있었다.

내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탓인지 그전에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던 우체통이라 무척 흥미로웠다. '슬로시티'라고 이름 붙여진 청산도와 딱 어울리는 느림우체통 앞을 빨리 뜨기가 쉽지 않았다.

3월 초인데 겨울바람처럼 몰아치는 찬바람에도 불구하고 나는 버텨 서서 엽서 한 장 써 부쳤다. 나에게 보내는 느린 메시지를 바람과 다투며 느리게 썼다.

'느림이 행복이다'를 기치로 하는 청산도가 좋아 가향 동인들과 함께 떠났던 여행. 이른 철이라 그렇게 유명세를 타고 있는 청보리 밭도 볼 수 없었고, 가지가지 꽃무리도 보지 못했다. 그래도 동인들의 우정을 꽃피우며 제철이 되면 달라질 섬의 풍광을 상상하며 슬로길을 걸었다.

1박2일로는 '느림'을 만끽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우리는 제한된 시간 때문에 슬로길도 서둘러 지나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느림의 미학을 이야기하면서도 '빨리빨리'라는 말이 입에서 줄곧 쏟아졌다. 거기다,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는 바람과 차가운 빗줄기마저도 일행들을 허둥대게 만들었다.

너무 빨리 걸어다니다 떠나온 것이 아쉬웠던 청산도. 꼭 느림을 실행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다시 찾고 싶었으나 아직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런데 청산도에서 느림우체통을 만나고 난 후 여러 도시에서 여러 번 느림우체통을 봤다. 너무 흔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여행지에서 눈에 띄었다. 청산도에서 첫사랑처럼 아릿하게 가슴에 담았던 느림우체통은 먼 훗날 다시 만난 그 사랑에 실망했다는 에피소드 같았다.

나는 이제 여행을 하다 느림우체통을 맞닥뜨려도 환호하지 않고 지나친다. 그렇지만 이 사진을 마주하면 여전히 청산도에서 처음 만난 빨간 우체통 앞에서 걸음을 오래 멈췄던 그때의 내 셀렘을 되살려내곤 한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