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 거제수필문학회 회장
김용호 거제수필문학회 회장

어렸을 적에 은행나무는 가끔 봤지만, 어찌된 까닭인지 그 열매는 기억에 없다. 그러던 은행을 육지에 나가서 그것도 제대를 하고 한참 뒤에야 그 열매를 맛 본 것으로 짐작되니 지금 내가 생각해도 약간 의아할 정도다.

쌉싸래한 향이 베여있는 그 고소한 맛을 처음 만난 것은 아마도 맥주집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얇은 갈색의 속껍질이 가끔은 붙어있는 그 푸르뎅뎅하니 말랑말랑한 구운 알갱이를 식기 전에 한두 알 이쑤시개로 찍어 먹는 맛이라니…, 그 알갱이의 바깥에 하얗고 딱딱한 껍질이 따로 있어 견과류에 들어간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뿐만 아니라 그 딱딱한 외피가 냄새나는 과육 속에 있었다는 것도.

은행나무는 고생대에 태어나 빙하기를 거쳐 살아난 화석나무로 일컬어지며 양자강 하류가 자생지다. 이는 근년에 중국의 사천성에서 발견돼 역시 화석나무라 불리며 가로수로 널리 심기고 있는 메타세쿼이아와 같이 몇 억만년 전에 지구에 출현했던 것이다.

그런 은행을 직접 주워 본 것이 몇 해나 됐을까. 머리만 스스로 복잡했지 몸은 매번 한가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시절이 있었다. 서울의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근처에 살았을 것이다.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배낭 메고 아내와 함께 은행 주우러 가는 거다. 이 가을에 그것만한 낭만이 어디에 있겠나.' 이런 생각으로 그냥 양수리 방면으로 차를 몰았다.

애써 느긋하니 가을의 정취를 감상하며 제법 돌아다닌 끝에 좋은 장소를 발견했다. 탐스럽게 열려 축 늘어진 가지의 바닥엔 벌써 떨어진 은행 알들이 그런대로 널려 있었다. 그런 은행나무가 군데군데에 있어 보였다. 차를 적당한 곳에 세우고 아내와 나는 줍기 시작했다. 누가 따라 오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급해지면서 줍게 되는 나의 손길에 스스로 쓴웃음을 지으며…. 아내도 풀밭을 뒤지며 신나했고, 비록 냄새나는 열매지만 노란색의 동그란 알은 탐스럽기 그지없었다.

시냇가에 앉아서 냄새나는 과육을 벗기기로 마음먹었다. 냄새나는 은행 열매를 그대로 아파트에 가져가서는 아니 될 일이다. 아내는 물에 들어오지 않고 개울가에서 쪼그려 작업을 하였지만, 나는 양말을 벗어 제법 차가워진 개울물의 복판에 발을 담그고 앉을 받침의 돌을 제대로 설치한 다음 자세를 잡았다. 상당한 분량을 주웠으므로 과육을 벗겨내는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 그래도 이 재미가 어딘가! 가을로 물들어 가고 있는 교외의 개울가에 한가로이 앉아서 그 풍광을 즐기며, 겨울 내도록 심심하면 고소히 구워 먹을 생각에 빠져 보는 게.

그런 추억으로 어려운 시기였던 그 해 가을과 겨울은 흘러갔다. 펜치의 손잡이 사이에 검지와 중지를 넣어 은행 알이 와싹 깨지지 않게 껍질을 깨는 요령도 터득했다.

나는 딱딱한 껍질을 벗기고 아내는 구워 내고. 한 해의 겨울을 그리 고소히 보냈다. 그 이후로도 더 몇 해를 서울바닥에서 보내다가 고향에 온지도 십년이 넘어 간다. 세지 말자 지나간 세월들. 그냥 많은 가을들이 덧없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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