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 수필가
김영미 수필가

"지리산 가자."
"지리산?"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친구들은 지리산에 가자고 했다. 산이라고는 동네 뒷산에도 올라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산도 그냥 보통의 낮은 산이 아니라 엄청 오르기 힘들다는 지리산이고 보니 쉽게 승낙하기 어려웠다.

오월의 지리산은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하늘정원을 방불케 한다는 달콤한 꼬임과 대학생활의 이야깃거리를 하나쯤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친구들의 설득에 같이 가기로 했다. 산에 오르는 것이 제 아무리 힘들다 해도 하루정도야 견디지 못하랴 싶었다.

약속된 날 아침 진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만났다. 다른 친구들은 무슨 에베레스트 산이라도 정복할 듯한 차림으로 나왔지만 나는 청바지에 보조가방 하나 달랑 메고 나왔다. 거기에 등산화는 커녕 운동화였다. 이 허술한 나의 행색에 걱정이 앞섰지만 젊음이라는 이름이 있어 애써 태연한 체 했다.

산은 생각처럼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지리산 종주를 벌써 열 번 넘게 했다는 친구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으나 나에게는 너무나 벅찬 길이었다. 지금이야 산길을 정비하여 초보 산행자도 거뜬히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잘 정비되어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굽이진 길과 수많은 돌들로 인해 길과 숲의 경계가 모호 할 정도였다. 거기다가 평상시에 즐겨 신던 빨간 운동화와 꽉 쬐는 청바지는 산길을 걷기에는 더없이 불편했다. 그뿐 아니라 운동이라고는 숨쉬기만을 해왔던 나인지라 산길은 나를 극한의 상황으로 내 몰았다.

준비 없이 산에 오른 나야말로 생고생이었다. 운동화를 신고 돌길을 걷다보니 이미 발바닥은 부르텄고 발가락은 아프다 못해 얼얼해진 상태였다. 거기에 땀을 잘 흡수하는 등산복이 아니라 땀이 흐르면 몸을 칭칭 감아버리는 청바지고 보니 다리는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오월인데도 지리산의 밤은 추웠고, 우리의 우정은 따뜻했다. 고단한 산행에 잠시 눈을 부치고 일어나니 짙은 안개는 말끔히 사라졌고, 보름달이 휘영청 떴다. 내 생에 그처럼 밝고 맑은 달을 본 적이 없었다. 산허리를 둥글게 감싸 안은 하얀 구름떼와 닿을 듯이 떠 있는 보름달은 은은하면서도 교교했다.

산봉우리는 섬이 되었고, 망망대해의 조그만 섬에 우리가 앉아 있는 듯했다. 사위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우리만 세상에 고스란히 남겨진 듯한 적요한 밤이었다. 잠시 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가 시작되었고 새벽이 밝아 올 때까지 뜬 눈으로 꼬박 밤을 새우고 말았다.

준비 없이 오른 지리산의 후유증은 일주일을 이불속에서 잠들게 했고, 한 달여 동안 절뚝거리며 다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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