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불던 날
태풍 불던 날
  • 거제신문
  • 승인 2017.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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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주 수필가
원동주 수필가

포세이돈의 진노가 시작됐다. 긴 머리카락과 수염을 날리며 삼지창을 들고 날뛰는 성미 까다로운 바다의 신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대소병도를 집어 삼킬 듯이 설치기 시작한다. 태풍 차바는 10월에 온 태풍 가운데는 가장 강력하다는 뉴스보도가 결코 허풍만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한바다로부터 밀려온 파도는 엄청난 소리를 내며 섬에 와 부딪혀 포말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장관이다. 나라는 온통 태풍 때문에 야단법석인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놀랍게도 나는 자연의 무서운 폭력을 감상하고 있었다.

내 나이 열여덟 살 적에 겪은 1959년의 사라호 태풍을 잊을 수가 없다. 태풍 '사라'는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인데, 당시 태풍으로부터 안전하게 방재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이라 엄청난 피해를 안겨줬다.

그때가 마침 추석이라 부산에서 여객선 한양호로 집에 도착해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는데, 새벽부터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바람 소리가 퉁소의 낮은 음처럼 묵직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이어 엄청난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비와 바람소리는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와도 같았다. 담장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나무는 맥없이 뽑혀나갔고, 초가지붕의 이엉은 온 하늘에 날리기 시작했다. 마을은 폭격 맞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엉뿐 아니라 날 수 있는 것은 모두 날아가 중봉산을 덮었다.

동네는 모두 허리까지 차는 물난리 판이었고, 방으로 들어오는 물을 퍼내느라 추석 준비는 엄두도 못 내고 엉망이었다. 사라호의 전국 피해 상황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태풍으로 인한 사망·실종이 849명에 이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대의 자연재해라고 보도했다. 사망과 실종자 수가 많은 것은 산사태와 바다에 나가 있던 배들이 전복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태풍이다. 인간의 교만과 허세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며 겸손과 겸허를 가르쳐 준다. 어쩌면 자연이 자연의 것으로 되돌려 놓는 위대한 장치가 태풍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태풍 차바가 지나가고 있는 여차 앞바다는 이미 평화로움은 저만치 가고 없다. 무시무시한 파도는 보는 이의 가슴을 떨리게 한다. 무섭다. 한마디로 무서움이 왈칵 스민다. 높이 치솟는 파도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몽돌을 스치며 내는 태풍의 울음소리가 더 소름 끼치게 만든다. 소리 없는 파도는 파도가 아닐지도 모른다.

비가 오고 있는데도 창문을 열어두고 소리를 불러들인다. 창문을 꼭꼭 닫아두고 소리 없는 파도를 보는 것은 마치 사운드 없는 텔레비전의 화면일 뿐이다. 존재의 확인은 청각에서 비롯된다. 공포는 시각이 아니라 청각 때문에 무서움이 배가 된다. 바람도 덜컹거릴 때 더 무섭고, 비도 빗소리 때문에 낭만적이 된다. 사랑도 속삭임으로 확인된다.

"철썩, 좌르르르…."

창을 열고 태풍이 지나가는 바다를 보며 또 한 번 자연의 위대함에 고개 숙인다. 이제 잠시 후면 태풍이 지나갈 것이고, 태풍이 지나간 여차 앞바다는 또 다시 평화로움이 찾아들게 될 것이다. 벌써 바람은 잦아들기 시작 했고 파도는 그 높이를 낮추고 있다. 창문에 덧붙여놓은 모기창이 파르르 떨리고 덜컹거리던 유리창이 가볍게 떨리며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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