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숙 수필가
서한숙 수필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귀걸이를 깜빡한 것이다. 부랴부랴 손에 쥐고 나오니, 간발의 차이로 내려가고 있다. 누군가의 호출을 받은 듯 가다 서다를 되풀이하다 급기야 문이 열린다.

종종걸음으로 들어가니, 아무도 없다. 거울 속의 '나'와 마주하고 있다. 양쪽 벽면이 거울로 둘러싸여 호기를 만난 느낌이다. 이를 말하듯 손아귀에 놓인 귀걸이가 더욱 반짝인다. 습관처럼 그것을 귓불에다 갖다 대고 귀걸이 자리를 찾는다. 그러는 사이, 다시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온다. 엉겁결에 고개를 돌린 나는 귓불을 사정없이 찔러버린다.

순간, 귓불이 화끈 달아올랐다. 귀걸이는 보이지 않고 귓불만 봉긋이 솟아올랐다. 그럼에도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좁은 공간이라 가만가만 숨을 죽여야 했다. 바깥으로 나온 뒤에라야 그것이 귀걸이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즈음엔 종종 귀걸이를 달고 다니곤 했다. 풋풋한 시절에는 목걸이와 실반지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불혹을 눈앞에 두고서 불현 듯 흔들려버린 것이다. 귓불에다 구멍을 뚫고 그 자리를 당당 귀걸이 자리로 내주었다. 그로부터 귀걸이는 심심찮게 나를 찾았다. 아니, 내가 그를 불러들였다. 목걸이도 반지도 불러들였다. 조그만 알갱이에서 나는 빛이 여간 탐스럽지 않았다. 모조품일지라도 그것은 한줄기 빛으로 스며들어 내 가문 날의 꿈을 한사코 들추었다. 그리하여 내가 다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음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것에 의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 십년 간 귀걸이를 잊고 살았다. 내 오랜 살붙이로 들앉기에는 이물질이 너무 많았다고나 할까. 그것으로 허상을 쫓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단순함을 추구하는 내 성격상 맞지 않았음은 물론 몸에도 맞지 않았다. 그것은 한낱 장신구에 불과했다.

불혹도 지천명도 넘어선 이즈음, 다시금 귀걸이를 찾고 있다. 봉긋 솟아 애를 태운 그날의 귀걸이 자리도 찾는다. 미처 여물지 못한 마음이 여기저기 앉을 자리를 찾느라 사뭇 분주하다. 장신구로 살지 않겠다던 지난날의 다짐도 한순간 무색해지고 있다.

스스로 나는 빛이 바랠 대로 바랜 것인가. 저기 저 그림자 너머로 아스라이 멀어져간 빛살마저 불러들인다. 그 틈새로 오버랩 된 내 어머니의 살아있는 눈빛이 보인다. 여든을 한참 지나고서도 화려한 장신구는 그나마 부지한 생명줄인 양 달려있다. 예사로운 빛으로 감싸기엔 너무 빛바랜 당신이었는지 모른다. 황금빛으로 여울진 반지와 목걸이가 커져갔던 이유를 내 젊은 날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순전히 빛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더는 피어날 수 없는 몸인 터라 시들지 않는 보석의 광채로 힘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치는 게 장신구일지라도 그것으로 꿈을 꾸고 싶은 지도 모른다. 더러는 고운 그 빛살을 몸에 휘감은 채 언제나 살아있는 눈빛이고 싶지 않았을까.

바람이 분다. 싱싱한 탄력을 세월 저편으로 밀어내는 바람이 분다. 소슬하게 불어오는 그것은 갈바람인지 한여름의 뙤약볕을 돌이키기엔 너무 시리다. 이따금 겨울이 머지않았음을 알리듯 칼바람도 분다. 그 바람에 떠밀려 빛살처럼 아스라이 스쳐간 귀걸이도 보이고, 목걸이도 반지도 보인다. 그들과 더불어 빛나고 싶은 내 마음도 보인다. 이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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