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숙 수필가

▲ 서한숙 수필가

엉겁결에 그의 우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내리치는 빗방울을 더는 피할 길이 없었다. 우리는 건널목을 지나 지하철역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그는 한때 우리 집앞 과일장수였고, 나는 그의 단골손님이었다. 내가 과일을 사러갈 때마다 구수한 입담을 늘어놓던 그는 한두 개씩 덤으로 얹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맛에 길들여진 나는 다른가게는 좀처럼 기웃거리지 않았다.

그의 나지막한 트럭은 언제나 싱싱한 과일들로 차고 넘쳤다. 그 앞에서 그는 밤낮없이 깨어나 과일 맛을 돋웠다. 가로등의 눈빛은 졸고 있어도 그의 눈빛은 졸지 않았다. 그런 만큼 과일 맛은 달랐다. 자부심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맛이 없으면 공짜"라고 습관처럼 반복하며 '고객'을 유혹하던 그였다.

하지만 나는 과일 맛이 없을 때가 있었지만 되 물린 적은 없다. 다만 그 자리를 살짝 돌아서 갔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의 눈은 '고객'을 놓치지 않았다. 저만치 멀어져가는 나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면서 함박웃음을 짓는 것이 아닌가. 그럴 때마다 다시 그에게로 발길을 돌린 나는 "아저씨의 과일 맛은 역시 최고"라고 화답하면서 천연덕스럽게 과일을 사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과일트럭이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엔 웬 젊은 부부가 대형트럭을 세워놓고 과일을 팔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호객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예전처럼 정감어린 과일 맛을 느낄 수가 없었던 나는 과일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쳐야 했다. 해를 거듭하는 세월 속에 그 자리에는 벌써 몇 번이나 과일트럭이 바뀌었다. 노점상의 변화가 잦은 가운데 거리풍경도 자연히 달라졌다.

단골 맛을 잃어버린 나는 한 대형마트의 당일배송 고객으로 남아 가끔씩 던져주는 할인쿠폰 맛에 길들여지고 있다. 클릭만 하면 열리는 인터넷 창(窓)으로 과일을 사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그럼에도 나는 덤으로 주는 그 사랑을 못내 그리워하곤 한다. 상하고 벌레 먹은 과일을 덤으로 줄지라도 그것이야 말로 구수한 입담 속에 오가는 진정한 맛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빗줄기가 쏟아지자 돌연 그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싱글벙글하던 아까 그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병원 수술비가 없어 일찌감치 과일트럭을 팔았다고 털어놓았다. 더러는 과일 속을 알지 못해 밑지는 장사를 한 적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그럴 때마다 상한 과일을 살짝 끼워 넣곤 했단다. 그러다가 '과일 속'보다 더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속'이라고 하면서 불현 듯 눈물을 글썽였다.

비는 다시 멈추었다. 하지만 그의 소리는 점점 힘을 잃어갔다. 거제에서 부산으로, 다시 서울로 옮겨왔단다. 서울에서도 큰 병원으로 가는 터라 모처럼 이발도 하고, 단벌 신사복을 손질해 입었다고 했다.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야윌 대로 야윈 모습이었다. 그저 멋있는 중년 신사인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뒤돌아선 나는 총총걸음으로 지하철에 올랐다. 덤으로 주는 그 사랑이 못내 아려지는 터라 더는 마주할 수가 없었다. 유리창 너머로 파란 우산을 접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짓고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도 내게 그러했다. 모두가 기약 없는 이별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의 과일 맛을 종내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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