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번뇌는 같은 것인가다른 것인가? 왜냐하면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등이 고통이면서 번뇌이기 때문이다. 반성해서 길을 찾게 하는 진리를 외면하는 일본의 답을 고쳐줘야 하는 고통은 번뇌보다도 크다.절대 우위적 존립의 미국·중국 양대 세력간에서 우리의 자강 역시 튼튼해야 하는 현실이 일본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 매몰돼 주위 환경을 저버릴 수 없는 고뇌가 앞서기 때문이다.자강·자존·자립의 힘 역시 한치의 이탈을 허락하지 않는 현시적 글로벌 국제 세계에서 하나로 택일해야 하는 우리의 생명적 소명이 확실하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치에서 거듭
6.25의 참극을 헤치고 국토의 벼랑 끝에서 회복을 되찾은 '인천상륙작전'을 다들 기억하고 있다. 우리의 중심은 어디에 있어야 하나.각을 세운 양대 진영마저 소아에 매몰되려는 비가치적 입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오로지 세계를 이끌 용단으로 마침내 자유민주주의의 구심점이 됐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요'라는 말은 분리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통합 자비의 큰 생명을 경배함이다. 그러므로 더 큰 능력으로 존재함으로써 새 생명을 실천하는 깨달음의 지혜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대선 상황 역시 자기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대아대의적 진실성에 있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내려놓는다 해도 그러지 못할 것이 있다. 그것은 가장 현실적인 삶을 위한 생활이다. 살아가는데 일과 목적이 있게 마련이라면 이러한 의식적 목적의 일은 그쳐지거나 중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은 변화 성장하는 정신에 닮아있기 때문이다.주변에 할 일이 너무 많다. 지도자는 지도자로서 농업·상·공업 그리고 일반 자영업으로서 제마다 주어진 할 일을 쫓아 산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만큼 사심과 편파심을 떠나서 옳은 일에 자긍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바야흐로 지금 코로나19 시대에서는 일사불
답답하기 한이 없다. 코로나는 바위같이 말이 없고 유동체의 바이러스 같지도 않다. 도무지 꿈쩍을 안 하는 무슨 장승이란 말인가? 인간의 좋은 데를 기원하려는 참모습을 숨긴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악귀란 말인가?아무것도 아닌 코로나를 달리 이름 지어 부를 것도 없다. 비단 최선의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그게 잘 들어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능력 이상으로 코로나는 지금 묵묵부답하고 있지 않나. 이럴 때 우리가 할 일은 대응의 적대시가 아니라 순응의 활로를 적응해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본다.그러면
하늘의 은한 (은하수)은 수억만의 별들이 모여 사는 동네다. 크기로 말하면 큰 나라의 몇 천배도 되는 별들이 그 속에 있어, 이러한 항성(恒星)의 작고 큰 무리들이 마치 강물이 흐르듯 보인다고 해서 은하수(銀河水)다. 실제로는 그 무리마저 수억 수천 개로 도대체 크기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곧장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태양계 같은 큰 우주의 한 덩이가 이마저도 알 수 없는 여러 수억 수천개의 이웃마을이 돼 한없이 질서정연한 방향으로 헤아릴 수 없을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과히 우주는 우주로밖에 여길 수 없다.어쩌면 코로나 사태를
개혁이든 혁명이든 시작의 불가피성에서는 이를 피할 수 없으며 대개는 빛의 방향으로 길을 내는 것은 인류 진화 과정이 줄곧 빛을 내재하고 왔기 때문이다.독재냐 민주주의냐 사회주의냐 자유주의냐 등을 놓고 따질 때 현실적으로 본질적 한국을 공경하고 사랑하고 실천하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의념적 투합이 아니며 이는 역사와 과정의 마디를 지닌 도약의 발판이 되기까지 수 없는 난관을 거쳐온 것이다.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그동안 이룬 것이 많다. 무엇보다 정신적 자강은 중요하다. 주변환경에 현혹돼 굴종과 비굴의
북의 남침은 민족의 금도를 지켜내지 못한 만행이었다. 나라의 초토를 자초한 과오가 중공군의 야욕을 채워준 결과물이었다. 지금에 와서 6.25의 참사를 다른 어떤 말로 둘러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국토 통일의 가장 빠른 길은 너도 나도 참회의 제단에서 통절히 반성하는 민족정기의 부활로 맥진하는데 있다.'개천에서도 용 난다'는 말은 이제 더 확실해졌다. 꼴지 수험생의 노력·정성·자강불굴의 의지가 대학입시 만점을 따내고, 어려운 환경속에 대학관문 영예의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그동안 우리사회는 언
사랑은 애정만으로 잘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비단 개인의 사랑에 대한 심각성만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사랑의 본질은 오히려 인류의 기원과 온 생명을 일깨워주는 힘일 것이다.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지만 의사의 재능과 환자본인의 쾌유를 염원하는 의지가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 몸이 살아난다는 것은 쉽고도 명백한 사실이다.그런데 이러한 진리와 명령, 그 책임을 제때 온 몸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늘 불신하고 의심하며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 몫을 지나치는 슬픈 역사가 되기도 한다.무엇보다 국제사회에서 진
우리는 빛의 속도에서 살고 있다. 빛이 얼마나 빠른가? 눈 깜짝 할 사이라고 한다. 눈의 망막에 사물이 보이고 먼 거리에 있는 산도 그 형체가 즉각 나타난다. 사물에서 오는 빛, 그러니까 그 빛이 망막에 닿는 찰나에 산은 산으로 분별하게 된다. 요는 빛의 속도로 보고 살고 있는 것이다. 보는 것도 초고속적인데 사람의 삶은 보는 감각뿐 아니라 마음이나 생각으로도 살고 있으니 생명체는 빛으로 환생해 산다고 할 수 있다.빛은 얼마나 빠른가? 빛의 속도는 1초에 30만㎞로 지구를 일곱번 반을 돈다고 하지만 실제 인간의 감각으로는 생각보다
정작 독 안에 흐려진 물은 반성과 참회, 그리고 자정수단만이 목적물을 이루게 한다. 우리의 염원을 이루는 가장 빠른 길이며 방법이며 최선의 진리다, 현실적으로 발전·변화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 그렇다고 자정능력을 불신해서는 안 된다. 불신의 부정이 곧 믿음이 아니다. 믿음 자체가 완벽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확고한 반석을 원하고 여기에 기틀을 장만하고 삶을 누리고 생활을 하게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우리사회는 너무나 혼돈돼 있는 것 같다. 사적 주장이 난무하고 지도적 입장에서도 이념대립과 자칫 편가르기로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나 자신이기도 하다. 내가 국가가 되는 이 진리. 내가 위기에 처했다면 그것은 곧 국가가 암울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국가의 위기는 체제의 강화에서 견뎌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이며 국민이 곧 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로운 것이다.자유의 만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은 어떤 면에서 너무 방일하고 일탈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그 어떤 풍요와 편리와 그리고 재산이 주어진 혜택을 잊고 살아가는
진실로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가? 우리는 우리 실력으로 모두를 지키는 것이다. 핵 위험과 위협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가진 자의 오만은 스스로 훼손됨을 알고 언어폭력을 사용하지 않아야 하며 이것보다 더 급한 것은 불신을 뉘우치는 능력이 필요하다.핵을 겁내서 우리의 갈 길을 못가는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 자유와 문화와 그리고 시장경제의 대국(大局)을 믿는 우리로서는 한미동맹의 의타적 두려움이 모두가 될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고칠 일이 비굴로서 성사될 것이 아니라 자력의 진리를 행동하고 견디고 포용해 끝내 이루는 것이다.핵을 보유한
목적이 있으면 해낼 수가 있다. 그 방향으로 움직여진다. 나아가게 된다. 사회적 희생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무엇일까? 지난해 12월11일 김용균 청년이 태안발전소 기계벨트에 감겨 숨진 참사가 일어났다. 이날 출근길이 죽음의 발걸음이 됐다는 것은 불같은 통곡을 자아내게 한다.태안발전소 참변과 같은 이런 비슷한 사고가 날이 갈수록 더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고 당사자 본인의 불행은 물론 어머니의 애절한 호소가 온 국민의 연민을 이끌어 끝내 국회 김용균법의 통과로 1차적 책임을 모면하는데 그칠 일이 아니다.그늘에 서 있으면 그늘이
'국민의 눈높이'라는 것이 있다. 사실의 정황이 이미 마음에 확증된 것을 말한다. 여론으로 내세워도 수긍할만한 심정이 될 때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진행되는 방향이 더욱 오리무중에 가깝다. 정치현실의 이러한 속성에 국민은 제대로 된 기회에서도 실기를 하게 되는 것은 역시 남보다 자기 탓으로 반성함이 마땅하고 분발해 생활할 일이다.'핵'을 가진다는 것은 국가의 직접적 안보 측면에서 이러한 일을 비평할지언정 적대시해 비난할 일도 아니다. 중요한 일은 핵을 총체적 민의의 우위에 두거나 자유민주주의로 성장한 조
왕자의 권위를 오예(汚穢) 속에 내려놓고 자비의 연꽃을 피우는 이는 누구인가? 형틀 아래에서도 돌을 맞으며 죽음까지 원죄로 돌리는 사랑의 눈빛을 보이는 이는 또 누구인가? 사람으로서 실수 한마디가 잘못돼도 처형되는 오늘날의 공포가 권좌로 군림한다면 어느 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언제나 옳은 문화예술은 자유의 본성에서 싹튼다. 기다리고 반성하고 인내할지라도 성장만이 유효하다. 제어장치의 완벽에서 컴퓨터가 살아나듯 개성의 자유를 달리 오해해서는 안 된다. 자유는 늘 책임과 구속이 자발적으로 따른다. 그리고 자유는 방만한 일탈과 나약에
우리 품에 뛰어든 새를 품어줘야 한다. 이 새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새다. 이 새의 잘못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이 새의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온 가족을 오롯이 살려내는데 있다. 그러려면 먼저 철저히 반성하는 일을 속이지 않고 품어주는 동족에게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만 변화의 바람은 현재의 능력을 더욱 배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온몸의 중심에 '심장'이 있음을 자각할 줄 알아야 한다. 북미 정상회담 역시 한미동맹의 신뢰와 중국의 선의를 이끌어내 통일한국을 이루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운전석의
촛불은 어떠한 정치 지도자나 사회단체에 의해 주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나라 청소년 학생들에 의한 점화였다. 올림픽에서 성화를 점화하듯이 순수하고 고귀한 횃불을 부정입학과 부당한 사회현상에 항거해 일어났던 진정한 요원의 불꽃이었다. 그러므로 촛불은 문화의 진수를 모두 포용하고 있다. 촛불은 어느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고 정의의 불기둥이 돼 영원한 힘이 돼줄 것이다.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하며 옳다고 하는 일만 내세워 진일보(進一步)한 사회를 가일층(加一層) 정화해야만 촛불정신에 다가갈 수 있다. 사리사욕을 끊고 당략 정
전쟁은 나는 것일까 안 나는 것일까 초미의 문제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우선 자기와 자기 주변의 목숨부터 생각하게 된다. 특별한 정치가나 지도자가 아닌 이상 국가안위를 먼저 떠올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전쟁이 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여기에 대한 사생결단의 각오 없는 행동이 문제가 된다. 왜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마는, 마냥 약한 방향으로 이끌려서는 끝내 목숨의 위대한 몫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들은 한 방향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한다. 삶의 위험을 느끼는 국민으로서는 전문가 이상의 상념을 하기도 한다.
봄이 오면 온통 연분홍빛 가슴이 물결치던 한때가 우리들의 눈에 가득해진다. 2002년 월드컵 축구 세계4강 진출의 그때, 그 환희는 더더욱 눈에 선하다. 골목골목이 아니라 진짜 가슴가슴마다 거리거리마다 한국민의 열띤 기쁨이 과히 충천하지 않았던가. 그때도 태극기만은 우리 민족의 국적과 혼의 상징으로 나부꼈던 실로 위대한 승리의 고향이었다.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에 태극기를 앞세우지 못하는 입장식은 올림픽 개최국으로서 아쉬움이 남는다. 평화와 통일은 이념이 아니며 그것은 오로지 실천에서 오는 것이다. 조급하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터전과 바탕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사단의 발생은 만단의 작용적 시점에서 결정된다. 하지만 이 또한 변화무상의 모양을 지닌다. 항상 출발이 있을 뿐이다. 인간사는 더욱 그렇다. 보수의 가치 또한 불변이 아니다. 그러므로 괴멸이나 타락하는 쪽으로 변해서는 안 된다.보수의 운용이 다를 뿐이다. 참시부검까지 이르거나 대상자의 의연함과는 구별돼야 한다. 죽음을 백 번하더라도 혼은 변함이 없다. 자기의 혼은 남아 있다. 공용의 것이 아니기에 모두의 터전은 있으나 방편의 것이다. 방편은 모태와 본연을 상징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