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석
전 거제문인협회장

촛불은 어떠한 정치 지도자나 사회단체에 의해 주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나라 청소년 학생들에 의한 점화였다. 올림픽에서 성화를 점화하듯이 순수하고 고귀한 횃불을 부정입학과 부당한 사회현상에 항거해 일어났던 진정한 요원의 불꽃이었다. 그러므로 촛불은 문화의 진수를 모두 포용하고 있다. 촛불은 어느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고 정의의 불기둥이 돼 영원한 힘이 돼줄 것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하며 옳다고 하는 일만 내세워 진일보(進一步)한 사회를 가일층(加一層) 정화해야만 촛불정신에 다가갈 수 있다. 사리사욕을 끊고 당략 정략이 모두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우리 국민모두가 바라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느낌은 쉽게 떠나지 않는다. 청년실업률의 중압감은 여전하다. 100만명이 넘는 청년실업은 임시방편 같은 해결책이 더러는 정략당략이 되기도 하지만 결코 청년들은 불공정한 소리에 현혹되지는 않을 것이다.

일자리는 기업이 왕성해야 늘려지는 것이 상식이다. 좁은 국토의 물리적 환경적 제약을 벗어나서 해외로 뻗어나가려고 하는 기업가의 의지는 우리 모두의 신념이다. 한정된 국가 예산을 자체에서 특정 부문에 과용할 수도 없다. 무조건 실업사태의 적령을 감내하는 것도 한계에 이른 것 같다.

그런데도 국가 예산은 선우선적인 분야가 따로 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 있는 국가 안보가 아닐까? 다행히 선도적 화해의 입지에서 한국이 나서서 세계 긴장의 틈을 예의주시 한다는 것은 결코 소아적 역부족적인 단상이 아니다. 인류 역사의 회전이 그 어떤 극한에서도 빛의 방향으로 굴절돼 온 것은 틀림없다. 극악의 고리는 누군가가 중개로 나서지 않으면 스스로 반전되지 못하는 속성이 있기 마련이다. 북핵이 여기에 닮아 있다.

그러므로 한국이 걸어가는 길은 너무나 당당하다. 여기서 우리들은 많은 역사의 근간을 광명의 틀로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3.1운동·4.19의거·5.18.민주항쟁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인류의 자유의사를 표출한 프랑스혁명과 미국의 자유여신상 등을 떠올릴 수 있는 것도 군중과 체제와 단체보다는 국민 개개인의 절대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맥락에서다.

북한도 이제는 사실의 중심에서 더는 숨기려 해서는 안 된다. 핵을 그만 정지하고 인민문화교육의 길로 선회하기 바란다. 한국은 더 속지 않으며 방어자강을 세계수준에 들여놓기 위해 북한을 이 길에 포용하는 것이다

한국은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 이상의 핵 상당능력을 비치해야 한다. 국민 일심동체가 돼 총체적인 삶과 특히 안보플랜을 확고히 해야 한다. 대한민국 건국 헌법의 수호 및 시장경제 산업화의 공과 민주주의의 자유민주주의적 변화의 양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북한은 인민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자유관련 역사가 곧 성장 발전의 모태임을 인정하고 이제는 북한도 경제 자유교역에 민간이 나서야 할 때다.

북중 친밀관계와 한미혈맹관에서 미국의 선도적 입장은 우리의 자유의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매듭이 있다. 근래 1세기의 역사는 한국적 환경에서 한미동맹의 계단을 징검다리로 삼아왔다.  그러므로 전쟁은 없다. 우리들이 이끌어낸 안보는 밝은 믿음이 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치득의 방법이 자유민주주의다.  방탕하지 않는 절제와 믿음이 필요하다. 자유의 열망은 삶의 씨앗이 된다. 동독이 무너진 것은 폭동의 우려가 아니라 자유가 폭발했기 때문이며 이 방향이 길이돼 장벽을 뚫었다.

폭력적인 힘은 극한에 다가가면 자연 소멸되기 마련이며 인민의 자유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철저히 민족 앞에 반성하고 평창올림픽의 해빙무드를 먹칠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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