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석 전 거제문인협회장
김한석 전 거제문인협회장

우리는 빛의 속도에서 살고 있다. 빛이 얼마나 빠른가? 눈 깜짝 할 사이라고 한다. 눈의 망막에 사물이 보이고 먼 거리에 있는 산도 그 형체가 즉각 나타난다. 사물에서 오는 빛, 그러니까 그 빛이 망막에 닿는 찰나에 산은 산으로 분별하게 된다. 요는 빛의 속도로 보고 살고 있는 것이다. 보는 것도 초고속적인데 사람의 삶은 보는 감각뿐 아니라 마음이나 생각으로도 살고 있으니 생명체는 빛으로 환생해 산다고 할 수 있다.

빛은 얼마나 빠른가? 빛의 속도는 1초에 30만㎞로 지구를 일곱번 반을 돈다고 하지만 실제 인간의 감각으로는 생각보다 더 빠르게 느껴지고 있다. 그래서 빛의 속도는 광년으로 단위 표시를 한다. 빛이 1년간 가는 태양과 지구 사이 거리, 1억5000만㎞가 0.00016광년에 불과하다. 태양에서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데 약 8분20초로 우리의 눈으로는 8분전의 태양을 매일 보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매일매일 순간을 생명체를 영위할 때 빛으로 이어지는, 거의 소실점에 이르는 그 어떤 경계점도 넘지 않으면 새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아픔도 고통도 넘어서야만 살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생명의 삶은 기쁜 것이며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생명은 기쁨이 있고 고통이 없는 자리다.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그 고통이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쉽게 고통을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들의 고통이 시작된 그 시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고통이 없는 경지를 파악한다면 그곳은 빛으로 이미 마련된 곳이다. 그런 곳을 몰랐거나 그동안 쌓인 고통의 시간을 한꺼번에 물리칠 수도 없는 망상에 잡혀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고통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모든 것, 그 아닌 것까지도 없는, 빛의 자리가 있을 뿐이며 또한 아무것도 없는 매우 청정한 자리에 산다면 사는 것이 아닐까!  빛의 시간으로 출발한다면 만사형통의 길도 여기에 있다.

국토와 민족의 통일을 성취하려는 우리로서는 반성과 참회와 일상의 고뇌에서 빛의 능력을 의심하지 말고 쌓인 나쁨(否)을 철저히 털어버릴 희망의 씨를 갖게 된다. 화해냐 적대냐 당근이냐 또는 채찍이냐 이 모든 적체 현상을 이별하는 경계(境界)의 순간이 더 중요하다. 

국회는 분열이 아닌 인내의 참회속에서 빛의 환경을 스스로 마련하고 함께하는 힘은 반성과 봉사의 빛에서 온다. 남을 괴롭히는 사람은 욕심이 많다. 자기밖에 모른다. 가까울수록 그에게 제 아픈 것만 호소하고 설득하려 한다. 이런 사람은 늘 괴롭다. 아픔은 그래서 생긴다. 과히 고통의 세계가 따로 없다.

봉사하고 희생하고 인내의 보약을 나누는데 나서보라. 이 이상 더 좋은 약이 있을까? 봉사·배려·참음은 첫째 가는 역동적 충전이다. 봉사는 약 이상의 치료제다. 보약이다. 참음은 문제해결의 으뜸이다.

한편 돈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외적 수단이며, 또 한편 내적 수단으로 질병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양립적 생각을 아우른, 가일층 원만한 생명 본래의 삶이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해 자유는 빛의 속성을 띠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독재의 나라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자유와 민주의 자각을 애초에 지니고 태어난 것이다. 새로운 삶이 된다. 국제사회와 협력을 강화하고 현시적 동맹관계의 역사를 귀하게 여길 줄 안다.

오늘날 국제사회의 경제 쟁점의 소재를 자체 생산으로 이룩하는 국민단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새로운 삶을 일깨워주는 생활의 실천이 곧 국익의 바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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