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떠난 빈집은 모두가 이럴까? 허물어진 나지막한 담장너머로 늙은 무화과 한그루. 농익다 못해 터져버린 꽃술에서 발그레한 빛이 배어나온다. 그 색에 현혹된 찌르레기는 마치 주인인양 분홍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마당 한편에는 주인이 심었을 리 없는 개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마당에 이리저리 널브러진 세간살이와 짝 없이 버려진 헌신짝만이 한때 사람이 살았음을 가늠케 할뿐이다.걸터앉은 마루는 낯선 사람의 방문에 놀랐는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켜켜이 쌓인 마루의 겉더께는 시간의 흐름을 짐작케 한다. 내 시선이 낡은 문짝 하나에
최고의 자산 가치는 건강이다.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됐다. 몇년 전부터 족저근막염과 오십견으로 팔을 제대로 돌리지도 못하고 걷기도 힘들었는데 그날따라 아픈 허리가 더 아팠다. 10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후 늘 어깨와 허리 통증을 달고 살았었다. 아플 때 마다 병원가서 진통제와 물리치료 처방 외는 나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포기하고 있었다.이번에도 시술을 받아 통증은 완화 됐지만 또다시 아파진다면 업무에 지장을 줄 것 같아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해 서울로 갔다. 버스안에서 엉치부위와 다리에 극심한 통증이 왔다. 이틀 전
화들짝 잠에서 깼다. 자는 동안 숨쉬기가 편치 못한 탓이다. 벽시계는 새벽 두 시를 조금 넘었다. 머릿속이 개운치 않고 흐릿하다. 며칠 전 감기 기운이 있었으나 약 먹기가 꺼림칙해서 병원도 가지 않고 버틴 적이 있다. 이번 종합검진에서 신장기능이 많이 약화됐다는 진단과 함께 항생제·항히스타민제 같은 약물사용에 유의해야한다는 의사소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일 정도 지나면서 감기는 절로 나았는데 그 후유증으로 부비동염을 앓게 됐다. 그냥 이러다 낫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신장기능을 의식해서다. 부비동염은 고통
1960년 5월에 홍도! 너를 만나려 학동에서 어장배 선장을 하는 선배의 도움으로 일곱 명의 선후배가 소주와 음료수를 가지고 홍도를 찾았다. 그 때는 등대지기 공무원이 섬을 지키고 있었다.현해탄을 바라보고 선 너의 모습은 내가 생각한 부드러운 홍도는 아니었다. 웅장한 모습, 함부로 손잡을 수 없는 인상을 주는 그런 섬이었다.정상의 약간 편한 등허리를 제외하고는 너무 가파른 섬, 갈매기가 살 수밖에 없는 바다. 억새가 바람에 장관을 이루고 갈매기는 자기 알을 보호하려 인간의 머리 위를 제트기가 하강하려는 듯이 공격을 한다. 모자를 준
며칠 전부터 부푼 마음으로 짐 보따리를 챙겼다. 환상의 동유럽 크루즈여행을 떠난다. 이스탄불·그리스·터키 8박10일. 크루즈여행은 1% 사람들이 간다는 여행이다.일본을 가보고 두 번째로 가는 크루즈여행. 크루즈여행은 준비할 것이 많다. 저녁식사의 정찬파티에 입을 옷을 준비해야 하는데 여성들은 한복 또는 드레스, 남자들은 양복을 필수로 가져가야 한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 탑승해 이스탄불까지 12시간. 긴 시간 동안 기내식 먹고 영화 두 편 보고나니까 도착, 생각 보다 쉽다.첫날밤은 위드라이프(주)에서 칠팔순
이른 아침부터 전화벨이 요란스럽다."별일 없제, 그냥 안 해봤나."이 한마디 남기고는 수화기를 놓아버린다. 아내는 그런 엄마가 다 큰 자식을 어린애 취급한다며 짜증스런 말투다.가지가 삭정이 되어 땅에 떨어지고 나면 그루터기에 흔적이 남는다. 옹이다. 나무가 키를 키우고 몸통을 불려나가려면 반드시 가지가 있어야 한다. 나무에 있어 옹이는 거목이 되기 위한 필연적 산물이다. 그러기에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거목에 박힌 옹이를 보면서도 가슴 아린 감정이 없는 것이다.하지만 구순의 장모는 가슴에 옹이 둘이 박혀 있단다. 젖먹이일 적에 맏
노년은 어떤 삶을 살 것 인가?나는 몇 십년 직장생활을 했다. 그리고 퇴직하고 나서는 교육이나 상담쪽 으로 공부를 해서 지쳐서 쉬고 싶은 사람들을 보듬어 주는 봉사 활동을 하고 싶었다.몇 년 전 절친이 마음 수련하는 곳을 추천해 줬다. 그러나 나는 대학원 다니면서 여러 프로그램을 경험했기에 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문득 가 볼까? 하는 물음이 생겼다.50여명이 강당에 모였다. 대학생들과 어른들 그리고 고등학생이 한 명 있었다. 고등학생은 학교에서 담배 피고 급우들을 괴롭혀서 학교의 권유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다 한다.산파라
장정길 형님 올해 74세, 나보다 열 살이나 많으신 분이다.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삭개오"처럼 작달막한 키에 체구도 왜소하다. 고향은 전남 완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이 뭍으로 나와 줄곧 부산에서 온갖 풍상을 겪으며 살아오신 억척같은 분이시다.20대 초반부터 양복점 시다로 들어가 일하면서 착실히 기술을 배우고 익혀 변두리 동네에 양복점을 차려 운영하면서 돈을 꾀나 벌어 집도 장만하고 시골에 밭데기도 사 놓을 만큼 경제적으로 다소 여유로운 생활을 하며 탄탄대로의 길을 걷는가 싶었고 불운이 닥쳐 올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더란다.&
창원시 구경(九景) 중에는 가로수길이 있다. 용호동 도지사 관사 옆 도로를 가로수 길이라 부른다. 아마도 창원시 계획도시개발 때부터 메타세콰이어 나무를 심었기에 수령 30년 이상 된 아름드리나무가 길 양쪽에 줄지어 서있다. 봄이면 연초록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하늘을 찌를 듯 한 기상과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단풍잎이 장관을 이룬다.언제부터인지 이 골목에 카페가 하나둘 들어서더니 지금은 서른 집이 넘는다고 한다. 간혹 이 길을 지나다보면 데이트족 들이 많이 다니고 커피숍 유리창 안에서 차를 마시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젊은 모습들을 볼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이 아니라 배우기를 즐겼다. 배우기 위해 찾아온 사람은 누구든지 제자로 삼았는데, 이는 모두 삼천명에 이른다.위기지학(爲己之學)에 따르면, 옛날에는 '나'를 위한 공부를 하고, 오늘날은 '남'을 위한 공부를 한다. 그런 것처럼 오늘날 우리사회는 남을 이기기 위한 공부를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인의 속성은 무엇보다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남보다 앞서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여유가 필요하다.내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싸우고 집에 돌아오면, 우리 부모님
일본 동북지방의 지진과 쓰나미가 있던 그 시각에 도쿄 근교인 사가미하라에 있었다. 오후 3시경으로 기억한다. 유리창과 바닥이 몹시 흔들렸다. 어쩌다 한 번씩 경험했던 약진과는 비교가 안 되게 흔들림이 강하고 길었다. 가상훈련에서 익힌 대로 몸을 낮추고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탁자 밑으로 기어들었다. 흔들림이 주춤해진 틈을 타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빠져 나왔다. 여진은 계속됐다. 전봇대가 흔들거리고 전선이 출렁거렸다. 흔들릴 때마다 바닥에 주저앉아 들고 있던 가방으로 머리를 감쌌다. 불안한 마음이긴 해도 이 흔들림만 멈추고 나면 제자리
가슴도 답답하고 어깨와 허리는 물론, 온 몸이 아프고 무거운 것을 보니 아무래도 몸살이 또 다시 올 것만 같았다. 남편이 와야 아이들을 맡기고 잠시라도 쉴 수 있으니 오로지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그런데 남편은 자신도 휴일이라 쉬어야 한다며 아이들에게 점심을 다 먹이고 나서야 여유롭게 병원에 나타났고,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차키를 챙겨들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갈 곳이 정해져있지도, 오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단 한 순간도 쉴 수 없는 고단한 일상,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막 스무 살이 될 때였다. 버스에서 내려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갑작스레 나타난 그가 말을 건넸다. 버스 안에서부터 곁눈으로 나를 지켜보다가 따라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그날로부터 우리의 만남이 시작된다. 나는 부산, 그는 서울에서 살았던 터라 만난 적은 그리 많지 않다. 짬짬이 안부편지를 주고받다가 방학 때 한두 번씩 만난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전무후무한 연인이 된 적이 있다. 부산의 '숙이'
어머니는 평생을 농사를 지으면 살아왔다. 벼농사며 콩·고추·옥수수를 재배해 자식들 뒷바라지며 학비까지 도맡았다. 아버지는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았으나 대부분 음주로 다 써버리고 학비며 생활하는 비용은 늘 어머니 몫이었다.겨우내 퇴비를 만들어 봄에 씨앗을 뿌리고 김을 메는 일이 연속이었다. 여름철에는 풀을 베고 논바닥을 헤매면서 해충을 잡았다. 수확은 미미했지만 그래도 자식들 생각하면 그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일이었다.해가 또 지나갔지만 생활이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었다. 한 해 겨우 아이들 뒷바라지하고
취업에 대한 고민과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주는 여유, 대학교 캠퍼스에서 느껴지는 젊음의 신선함을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간직하고픈 욕심에 나는 7년 간의 대학교생활을 보냈다.물론 대학교에서의 세계와 직장에서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회생활은 너무나 다르지만 살아가는 28년 동안 가장 좋은 어른들을 7년 간의 대학교 생활에서 만나왔다는 사실에 아직도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때때로 나는 그분들이 너무나 그립다.사학과 전공수업시간이었다. 도진순 교수님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자문위원이시며 역사교과서 편찬위원회와 우리나라 백
틀니 지원사업을 도지사공약사업으로 한 지 여러 해가 지났다.올 한 해 연간 100여분의 어르신에게 의치를 무료로 지원해주는 혜택이니 시민들을 위해 매우 감사한 일이다.아침 9시가 되기 전에 연세가 많으신 노인 한 분이 자동문을 못 열고 지팡이를 짚고 계신다. 들어오시라고 문을 열어드리니 원탁 의자에 앉으신다."네가 틀니 때문에 물어 볼 게 있어 왔소."내용을 들어보니 틀니 비용을 지원받으러 오셨다."어르신, 그런데 올 해는 예산을 다 써버려서 돈이 없어서 지원을 못 해 드립니다.""뭐라꼬?""내가 귀가 먹어 잘 안들리거마!"양손 팔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푸른 하늘 끝닿은 저기가 거긴가아카시아 흰 꽃이 바람에 날리니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고개 넘어 또 고개 아득한 고향저녁마다 놀지는 저기가 거긴가날 저무는 논길로 휘파람 불면서아이들도 지금쯤 소 몰고 오겠네.'윤석중 작사·한용희 작곡의 '고향땅'이라는 노래다.어렸을 때는 집집마다 소를 한두 마리는 키웠다. 주된 목적은 농사일을 위해서였고, 살림밑천으로 삼기도 했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이면 소를 먹이러 가는 것이 일과였다.소를 먹이러 갈 때는 혼자서가 아
그는 소식이 뜸한 나를 일깨우듯 가끔씩 전화를 걸곤 했다. "서양, 나 아직 안 죽었다"는 말은 저리로 돌아앉은 세상과 소통하려는 그만의 독특한 해법이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났다. 추석 한가위를 이틀 앞두고 귀성길을 떠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 한 채 훠이훠이 멀어져갔다.달포 전만 해도 이제 막 시작한 공부를 언제 마치는지 따져 묻던 그였다. 가까운 지인들의 근황도 살피고 이런저런 당부도 곁들였다. 평소와 달리 건강한 목소리에다 통찰력을 보여 병상에서 일어나는 줄로 알았는데, 어찌하여 세상 줄을 놓았단 말인가.아닐 것이다. 이
서울에서 거제로 내려오는 버스에 올라 자리를 찾아가는 중이었는데 지나는 길에 누군가가 "품위없이" 하며 맨 뒷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고있는 아줌마들을 향해 중얼거렸다. 내가 앉아야 할 좌석이 맨 뒷자리였는데 세 사람의 아줌마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퍽 친한 일행으로 보였다."여기는 제자리입니다"고 했더니 아주머니는 멀미가 심하고 같은 일행이라 함께 가고 싶으니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했다. 흔쾌히 양보하고 아주머니가 앉아야 할 자리에 갔더니 옆자리 남자는 먹다 남은 음식을 자리의 포켓에 아무렇게 쑤셔넣어 여간 불결해 보이지 않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생겨나면서부터 경쟁이라는 힘겨운 삶에 놓이게 된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숲 속에 떨어진 작은 씨앗마저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경쟁은 일어나고 있다.대부분의 놀이는 가위바위보를 통한 차례 정하기로 시작된다. 몇 초만에 판가름이 날 손내밀기에도 고도의 눈치작전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성향과 의도를 꿰뚫어 볼 줄 알아야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 여기서부터 나는 좌절을 맛보게 되는데, 먼저 시작해야 유리한 놀이도 많기 때문이다.땅따먹기를 시작하기 전 흙바닥에 정성들여 두부같이 반듯하게 선을 긋는다. 네모로 줄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