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숙 거제문인협회 회장
서한숙 거제문인협회 회장

그는 소식이 뜸한 나를 일깨우듯 가끔씩 전화를 걸곤 했다. "서양, 나 아직 안 죽었다"는 말은 저리로 돌아앉은 세상과 소통하려는 그만의 독특한 해법이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났다. 추석 한가위를 이틀 앞두고 귀성길을 떠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 한 채 훠이훠이 멀어져갔다.

달포 전만 해도 이제 막 시작한 공부를 언제 마치는지 따져 묻던 그였다. 가까운 지인들의 근황도 살피고 이런저런 당부도 곁들였다. 평소와 달리 건강한 목소리에다 통찰력을 보여 병상에서 일어나는 줄로 알았는데, 어찌하여 세상 줄을 놓았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이 세상을 다 꿰뚫은 터라 저 세상으로 소풍을 떠났을 것이다. 그를 찾는 사람들이 하도 뜸해 날개를 달고 옛사람들이 와글와글 거리는 곳으로 구경하러 갔음이 틀림없다. 허구한 날 병상만 지키는 삶은 '살아있음'이 아닌 터라 그는 살기 위해 저 너머의 강을 건너갔을 것이다.

그러다가 습관처럼 다시 전화벨이 울릴 것이다. "서양, 나 아직 안 죽었다"고 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어이없이 허물고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를 깡그리 잊고 살던 나는 이에 맞장구를 치면서 "저도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어요" 하고 능청을 떨면서 한바탕 크게 웃을 것이다.

그렇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는 아직도 살아있을 것이다. 이 세상이든 저 세상이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그가 품은 詩앗을 나누어줄 것이다.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빈집의 설움을 통째로 껴안고 쓴 시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줄 것이다. 그들 또한 나처럼 그 속에 담긴 시인의 이야기에 푹 빠지면서 허스키한 목청에서 울리는 삶의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든을 넘어서면서까지 시를 쓴 그는 그 속에다 그리움을 알알이 풀어놓았다. 그러고도 못다한 그리움은 가슴을 쥐어짜며 홀로 삭여야 했다. 한 세상 그리움에 물든 채 살았으니, 또 한 세상은 만나고 싶은 사람일랑 후회 없이 만나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발길이 닿는 곳곳마다 사람들로 들끓는 만남의 광장이 되고, 사람과 사람과의 연분도 알알이 맺어져 그 옛날, 아득한 봄날도 다시 피어날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도 그는 인간답게 살라는 말을 무시로 하곤 했다. 그런 만큼 힘든 게 인간의 길임을 진즉 알고 되뇌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세상 짐을 다 벗어버리고 빈집을 벗 삼아 살았을까.

그가 떠난 지도 벌써 해를 거듭하고 있다. 이를 알리듯 유리창 너머에는 돌풍을 동반한 장맛비가 세차게 몰아친다. 그 사이로 일렁이는 그리움을 붙들고 불현듯 그를 떠올린다. 그동안 하던 공부를 마쳤다는 소식을 들려주고 싶어서다. 나의 이 성급한 자랑질을 두고 그는 무슨 말을 하려나. 갸웃갸웃 고개를 흔들지 호통을 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그를 외면할 수도 없다. 이기적으로나마 나는 그의 말벗이 아니었던가.

거가대교를 달리는 일도 제법 익숙해지고 있다. 예전처럼 앞만 보고 달리지 않아도 되는 터라 간간이 바닷바람을 쐬기도 한다. 보이는 것마다 예전 그대로이다. 수평선도 보이고 갈매기도 보인다. 철썩이는 파도소리도 들려온다.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는 없다. 아스라이 멀어져가던 세상을 붙들고 애써 날 불러들이던 그날의 인기척과 함께 사라지고 없다. 간간이 울리던 전화벨도 더 이상 울리지 않는다. 어디에도 없다. "서양, 나 아직 안 죽었다"고 하던 그날의 너스레만 살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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