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정 수필가
박찬정 수필가

일본 동북지방의 지진과 쓰나미가 있던 그 시각에 도쿄 근교인 사가미하라에 있었다. 오후 3시경으로 기억한다. 유리창과 바닥이 몹시 흔들렸다. 어쩌다 한 번씩 경험했던 약진과는 비교가 안 되게 흔들림이 강하고 길었다. 가상훈련에서 익힌 대로 몸을 낮추고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탁자 밑으로 기어들었다. 흔들림이 주춤해진 틈을 타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빠져 나왔다. 여진은 계속됐다. 전봇대가 흔들거리고 전선이 출렁거렸다. 흔들릴 때마다 바닥에 주저앉아 들고 있던 가방으로 머리를 감쌌다. 불안한 마음이긴 해도 이 흔들림만 멈추고 나면 제자리로 돌아가 쏟아지고 흩어진 것들을 정리하고 일상으로 되돌아가려니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도 여진은 계속됐고 상가는 철시했다. 도쿄 번화가인 시부야 고층빌딩 내에서 근무하는 아이가 걱정됐지만 핸드폰으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 통신이 원활하지는 않아도 전혀 두절된 것은 아니라서 모두들 전화기를 손에 쥐고 혹시라도 통화가 될까봐 전전긍긍 한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음은 급하고 초조했다. 역으로 진입하는 전차는 보이지 않고 평일임에도 역사(驛舍)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관동 일대 전 노선이 운행을 중단하고 선로 점검 중이라는 방송만이 계속됐다. 시간이 흐르자 금일 중엔 운행 재개가 안 된다는 방송으로 바뀌었다.

우왕좌왕하는 중에 삼월의 짧은 해는 기울어 어둑해졌다. 집에 갈 방법이 막연하다. 한 걸음이라도 집 가까이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거기도 이미 버스는 끊어져 발이 묶여 있긴 마찬가지였다. 역 주변 숙박이 될 만한 업소는 모두 만실(滿室) 표지판이 내걸려 있었다. 전차로 40분가량 걸리는 거리이니 집까지 걸어간다면 밤을 새워 걸어야 할 판이다. 모르는 지역에 가서 오도 가도  하는 것보다 차라리 치안이 안전한 역사 안에 있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선로 점검을 마치면 새벽 첫차부터는 운행되지 않을까는 기대도 있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출입문이 따로 없는 역사에 모여 들기 시작했다.

크든 작든 천재지변이라면 토를 달지 않는 일본인이니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귀가를 포기한 사람들이 벽에 기대어 앉는다. 양복입고 넥타이를 맨 직장인도, 학생도, 아가씨도 도리 없이 모두 역전 노숙을 할 모양이다.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방을 뒤져 깔만한 것은 다 깔았어도 냉기가 그대로 온몸에 전해진다. 모두가 창졸간에 바깥 잠을 자게 된 처지여서 준비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수가 좋았거나 행동이 민첩하여 편의점에서 내놓은 종이 상자 하나를 구해 깔고 앉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텔레비전의 화면은 동북지방 해안을 덮친 쓰나미와 후쿠시마 원전에 맞추어져 있다.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이 흔적 없이 쓸려나간 이재민의 아픔을 어찌 하룻밤 노숙하는 괴로움에 비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지금 앉은 자리의 냉기로 뼈가 시린 것이 더 견디기 힘들다. 날이 밝기에는 아직 멀었고 집에 갈 방법 또한 막연하지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깔만한 것을 구하기 위해 어두운 거리로 나섰다.

역에서 멀리 떨어진 약국 앞까지 가서 작은 종이상자 두 장을 주웠다. 다시 역으로 돌아 왔을 때 내가 앉았던 자리는 벌써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다. 한 장을 깔고 한 장은 무릎을 감싸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맨바닥에 앉아 곧추세운 두 무르팍에 얼굴을 묻고 있는 옆 사람을 가만히 흔들어 한 장을 주었다. 그도 사양할 여유가 없다. 종이상자 한 장 깔고 앉은 것뿐인데 몸이 느끼는 온기는 사뭇 따듯했다. 나는 그날 밤 종이 상자 하나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하고 큰 것인지를 잊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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