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 되던 1945년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78%였다. 문제는 선거 때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기호 대신 작대기를 사용했다. 투표용지에 작대기를 세어보고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을 찍었다. 거리에서는 '작대기는 하나, 작대기는 하나 홍길동'이런 식으로 선거운동을 했다.인도에서는 아직도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1/4이나 되기 때문에 연꽃·나비 심지어 빗자루·베개·싱크대 등 유권자들에게 친숙한 물건들을 정당의 상징으로 내세워 그 문양을 보고 투표하고 있다.해방 후 열에 여덟은 까막눈이었는데, 한글정책으로 10년만에 열에 여덟은 글자를
'삼시세끼'는 tvN에서 방송중인 예능 프로그램이다. 유명 연예인들이 시골집에 모여 하루 세끼 밥을 직접 해먹는다는 것이 콘셉트다. 뭐 특별한 이벤트도 없이 그냥 평범하고 잔잔한 일상인데도 흥미롭다.집에서 한 끼도 밥을 먹지 않는 남편은 무식이, 한 끼만 먹으면 일식이, 두 끼는 두식이, 세끼를 다 챙겨 먹으면 '삼식이 새끼'라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농담속에는 퇴임 후의 남성들의 비애가 담겨져 있다.엊그제 발표를 보면 국민 1인당 하루 쌀 소비량은 155.8g으로 하루 종일 밥 한 공기(200g)도 안 먹는단다. 옛날에는 못살아
비가 오는 날이면 파전에 막걸리가 생각난다. 한 여름이라도 삼겹살 지글지글 굽으면 소주가 생각나고, 치킨이 있으면 맥주가 생각난다. 술은 맛보다는 분위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우리의 술 문화는 어떤 정서적 분위기일까? 당나라 시인으로 달과 술을 사랑했던 이백(李白)을 빼놓을 수 없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라는 동요에 나오는 사람으로 비록 중국사람이지만 그가 우리나라의 사대부나 시인묵객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혼자 술을 마신다 /잔 들어 달을 부르니 /그림자까지 셋이 되었네'라
조선중기 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悌)는 술을 좋아했다. 어느 날 잔치 집에 갔다가 그날도 술에 흠뻑 취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말을 탔는데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있었다. 이를 본 하인이 "나으리, 신발을 짝짝이로 신으셨습니다요" 하고 말을 하자 임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야 이놈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길 왼편에서 보면 나막신을 신었구나 할 테고, 오른편에서 보면 가죽신을 신었구나 하겠지. 괘념치 말고 어서 집에나 가자."이 이야기는 조선후기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집 제7권 낭환집서( 丸集序)에 실려 있다. 낭환은 쇠똥구
전근대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직업으로 분류한 신분제도가 존재했다. 여덟 부류의 천민에 속하는 팔천(八賤)을 제외한 사회구성원은 사민(四民)이라고 해서 선비, 농민, 장인, 상인(士農工商)으로 나누어졌다. 그 중 상인은 장사꾼, 장사치, 장돌뱅이 따위의 하대되는 직업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양 상인들의 힘은 막강했다. 지금의 종로 6조 거리를 중심으로 육의전(六矣廛)을 비롯한 허가 받은 가게인 시전(市廛)만이 물품판매 독점권을 갖고 있었다. 10리 안에는 같은 물건을 파는 가게도 없었다.조선 중기 임란과 병란 이후 사회변화와 함께 농
이이와 이순신은 덕수 이씨(德水李氏) 종친이다. 율곡이 병조판서일 때 하급군관이었던 이순신에게 만나자고 전갈을 넣었다. 요즘으로 치면 국방부장관이 일개 소대장을 부른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회동을 이순신은 거절한다. 아무리 문중 일가라 해도 인사권을 쥔 사람과 사사로이 만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이유였다.조선시대 분경금지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권세가 높은 친척집을 드나들며 청탁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다. 분경(奔競)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줄임말로 '분주히 쫓아다니며 이익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요즘으로 치면 '공직자 등에 대한 부정
영국 속담에 '젊었을 때 여행하지 않으면 늙어서 얘깃거리가 없다'고 했고, 인도 속담에는 '가장 귀중한 자식에게는 여행을 시켜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석학 이어령 선생도 '여행의 양이 인생의 양이다'고 했다.여행은 순례라는 종교적 행위에서 시작됐다. 그래서 여행 '트래벌(travel)'은 그 어원이 '고행·고생·고난'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트라베일(travail)'이다. '집을 떠나 여행하는 것은 고생'이라는 것이다. 시쳇말로 압축하면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지금이야 교통수단이 좋고 사전정보도 충분, 안전도 확보돼 여행하는데 별
사람은 누구나 어떤 잘못을 저질러 망신을 당하거나, 바보 같은 말을 내뱉고 나면 부끄럽고 쑥스러워 얼굴을 못 든다. '쪽팔리기' 때문이다. '쪽'은 얼굴이고, '팔리다'는 널리 알려지는 것이다. 허기야 요즘은 마스크를 쓰고 다니니까 쪽팔릴 일도 없을지 모른다.왜 쪽팔리는가? 부끄러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왜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염치를 알기 때문이다. '염치(廉恥)'는 '체면을 차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이때 '체면(體面)'은 '남을 떳떳하게 대하는 얼굴'이고, '부끄러움'은 '양심에 거리끼어 떳떳하지 못한 마음'이다.염치를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남자가 외국으로 떠나게 됐다. 출국 때 남자가 말했다. "내가 일년 후 그대에게 장미꽃을 보내 줄께. 그때 장미꽃이 백송이가 안 되면 날 기다리지 말아줘." 그리고 일년 후 장미꽃이 배달돼왔다. 여자는 장미 꽃송이를 세어보고 또 세어 봤지만 장미는 99송이 밖에 되지 않았다.여자는 실망해 카드를 읽을 생각도 못하고 울다가 얼마 후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런데 그 카드 속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마지막 장미 한 송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당신입니다. 당신은 나의 영원한 한
사서에 기록되기를 ‘안영의 키가 여섯 자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의 한 자(尺)는 지금의 22.5cm 가량이었으니, 물론 시대마다 척도가 다르다 하더라도 안영의 키가 140cm 정도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안영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였다. 초왕 영왕은 키 작은 안영을 초반부터 제압하기 위해 대문은 닫아놓고 개나 드나드는 작은 문을 만들어 놓고 거기로 들어오라 했다. 안영이 “개나라에 왔으니 개구멍으로 들어가야지요.” 초왕이 이 말을 듣고 놀라 큰문을 열어준다.안영을 보자 초왕이 키 작은 걸 빗대어 “제나라에는 인재가 없는
인간이나 동물의 힘을 이용했던 시절에 증기기관의 발명은 산업혁명의 계기가 되었다. 수레나 마차가 운송수단이었던 1825년 영국에서는 세계최초로 증기자동차를 만들었다. 실내에 6명이 타고 나머지는 지붕에 올라타는 18인승 2층 버스였다. 차가 달리는 중에도 석탄으로 불을 때서 증기를 만들어야 했기에 버스의 무게는 무려 18톤이 넘었다. 차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연기와 매연, 소음이 문제였다.간혹 엔진이 폭발하거나 마차와 부딪치면서 생명을 잃는 일도 일어났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동차의 출현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마차업
조선 역사를 통틀어 최연소 판서는 남이(南怡·1441∼1468) 장군이다. 17세에 무과에 급제해 세조 13년(1467) 이시애의 난을 평정, 26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오른다. 권력의 중심축이 남이 장군쪽으로 기울자 훈구대신 한명회 등은 간신 유자광을 이용해 남이의 역적모의를 고변케 하여 남이는 능지처참을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한다.남이의 국문 때 영의정 강순이 지켜보고 있었다. 강순(康純)은 남이와 함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할 때 지휘관으로 함께했던 인물이었다. 예종 임금이 누구와 역적모의를 했는지 자백하라며 고문하자 남이는 강순을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1941년 가수 백난아 씨가 부른 이 노래는 80년이 더 지난 지금도 향수를 달래는 대표적인 노래가 됐다. KBS '가요무대'에서도 가장 많이 불린 노래 1위가 '울고 넘는 박달재'이고, 2위 '찔레꽃'일 만큼 애창되고 있다.찔레꽃이 피기 시작하는 무렵을 '찔레꽃머리'라 한다. 참 예쁘고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머리'는 '처음'을 뜻한다. 그러니까 '찔레꽃 필 무렵'은 5월의 시작을 뜻한다.찔레꽃은 작고 수수하지만 짙고 화려한 향기를 가진 매력적인 꽃이다.
거제는 천만관광 도시를 꿈꾸고 있다. 모노레일·케이블카·정글돔을 만든 것도 관광객 유치를 위한 시설이다. 천혜의 자연경관은 덤으로 하고, 스토리가 있는 '거제관광 콘텐츠'를 개발한다면 제주가 부럽지 않는 관광지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굴뚝 없는 산업이라는 관광산업은 후기 자본주의경제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이다. 이에 따라 관광지는 주민의 삶의 질보다는 돈을 쓰러 오는 관광객의 편의와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재배치하게 된다. 주민들조차 이제는 자기 마을을 전통과 문화보다는 관광객의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여행이 아닌 관광의
'3체병'이라는 것이 있다. 없는 놈이 있는 체, 못난 놈이 잘난 체, 모르는 놈이 아는 체 하는 것이다. 이는 체면문화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때론 이런 허세로 분에 넘치는 지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엉터리 악사 남곽의 이야기가 꼭 알맞다.전국시대 제나라 선왕 때였다. 왕은 우(竽·생황)라는 피리 합주를 감상하는 취미가 있었다. 왕의 뜻에 따라 우 연주에 능한 악사들을 최고의 대우로 초빙했다. 그렇게 해서 300명이 넘은 대 악단이 조직됐다.남곽(南郭)이라는 한량이 있었다. 남곽은 왕을 찾아가 자신이 우 연주에는 최고의 전
영국 의회에서 어떤 초선의원이 청산유수로 연설하고 나서, 연설의 대가인 윈스턴 처칠에게 다가와서 자기 연설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다. 멋진 연설이었다는 칭찬을 기대했는데 대답은 의외였다. "다음부터는 좀 더듬거리게, 사람들은 좀 부족한 듯한 사람을 더 좋아한다네."중국 초나라 때의 일이다. 제사를 지낸 뒤 하인들에게 술을 마시라고 주었는데 양이 딱 한 사람이 마실 정도였다. 그래서 하인들이 땅에 뱀을 먼저 그리는 사람이 술을 차지하기로 했다. 한 사람이 뱀을 먼저 그리고 나서 한손으로 술병을 잡은 채 "나는 발까지 그릴 수 있다네"
전통혼례에서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미리 예물을 보내는 절차를 납폐(納幣)라 한다. 이때 혼서지와 채단 등을 넣은 함(函)을 지고 가는 사람을 함진아비라 한다. 신랑의 친인척 중에서 예의범절에 바른 어른이 앞장서고 함진아비는 복수(福手)라 해서 하인 중에서 가장 복이 있다고 여길만한 사람이 뽑힌다.함 안에는 가장 중요한 혼서지(婚書紙)가 들어간다. 혼서지는 신랑의 아버지가 신부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다. '귀한 따님을 곱게 키워서 부족한 자식과 짝을 지어주시니 감사하다'는 인사와 신랑쪽 가문에 대한 소개가 적혀 있다. 혼서는 신부가
'기호(記號 Sign)'란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의 합의된 약속이다. 따라서 언어의 기호체계를 개인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이를 불가역성(不可逆性)이라 한다.하늘을 보고 바다라 우긴다고 하늘이 바다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늘이라는 언어와 실제는 어떤 필연성을 갖는 것도 아니다. 한국사람만 '하늘'이라 하지 미국사람은 'sky(스카이)' 중국사람은 '天(티엔)'이라 한다. 언어는 사물 자체가 아니고 하나의 기호이며 상징이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어를 통해 문화는 전승되고, 소속집단의 동질성이 확보된다. 그래서 말과 글은 바르고
유럽문화는 찬란했다. 그들의 건축은 화려했고 예술은 기품이 있고 귀족의 삶은 우아하고 멋스러웠다. 중세에 와서는 상공업의 발달로 생활의 여유까지 생겨 로맨틱한 낭만의 세계를 꽃 피웠다. 그런데 희한하게 17세기까지 화장실이 없었다.집에서 사용한 요강의 오물을 밤이 되면 창밖으로 쏟아버렸다. 거리는 똥물과 악취로 가득했다. 똥을 밟지 않기 위해 굽이 높은 하이힐이 생겼고, 떨어지는 똥물을 피하기 위해 파라솔이 등장했다. 악취는 역설적으로 향수산업을 발전시켰다. 서양의 고상한 문화의 뒷면에는 똥물이 얼룩져 있다.우리나라는 어땠을까? 농
팬티를 입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지금과 같은 모양의 팬티는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 전에는 팬티라는 개념이 없었다. 일본의 전통의상인 기모노만 해도 팬티를 입지 않았다. 그러다가 빌딩 화재사건 때 기모노를 입은 여성만 불에 타 죽은 일이 생겼다. 높은 데서 뛰어내리면 옷이 날려 아랫도리가 훤히 드러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 후로 속옷을 입게 되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다.우리나라 여자한복의 치마 맨 안에 다리속곳을 입었다. 다리속곳은 앞에서 보면 T자 모양으로 어린아이의 기저귀처럼 채우고 위에는 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