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직업으로 분류한 신분제도가 존재했다. 여덟 부류의 천민에 속하는 팔천(八賤)을 제외한 사회구성원은 사민(四民)이라고 해서 선비, 농민, 장인, 상인(士農工商)으로 나누어졌다. 그 중 상인은 장사꾼, 장사치, 장돌뱅이 따위의 하대되는 직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양 상인들의 힘은 막강했다. 지금의 종로 6조 거리를 중심으로 육의전(六矣廛)을 비롯한 허가 받은 가게인 시전(市廛)만이 물품판매 독점권을 갖고 있었다. 10리 안에는 같은 물건을 파는 가게도 없었다.

조선 중기 임란과 병란 이후 사회변화와 함께 농촌사람들이 한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난전(亂廛)이 생겨났다. 난전은 무허가 점포로 길에 함부로 벌여놓은 가게를 말하는데 흔히 말하는 야매로 영업하는 사람들이다. 숙종 때부터 전안(廛案)이라고 해서 시전에서 취급하는 물품의 종류와 상인의 신상을 등록하는 문서가 있었는데, 여기에 등록되지 않은 자가 상행위를 하면 무조건 난전으로 보았다.

난전이 번창하자 건전한 유통질서를 확립하고 등록 상인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육의전과 시전에 부여한다. 이는 마치 경찰권과도 같아서 난전의 물건을 압수하거나, 난전상인을 체포 구금하여 체형도 서슴지 않았다. 민심은 나빠졌고, 난전은 4대문 밖으로 쫓겨나 성 밖에서 새로운 시장을 형성했다. 그런데 금난전권의 배후에는 당시 권력을 쥔 노론이 있었다. 막대한 정치자금이 오고가는 정경유착이 이뤄지고 있었다. 1791년(정조15년) 정조는 탕평정책의 상징과도 같았던 당시 좌의정 채제공의 상소를 빌미로 난전도 정식시장으로 인정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공표한다.

이로써 금난전권은 폐지되고 누구나 자유롭게 장사가 가능해졌다. 그 이면에는 노론의 돈줄을 끊어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의 속셈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조선후기 상업발전의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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