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의 성(城)11】거제시 일운면 '지세포진성'…계해약조의 역사적 배경이 서린 곳

거제는 성곽유적의 보고(寶庫)다. 삼한시대 변진 두로국부터 왜와 국경을 마주한 탓에 수천년 동안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거제지역 성곽 유적의 역사 속엔 외적을 막아 나라와 가족을 지키려 했던 선조들의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다. 특히 거제지역의 성은 시대별·형태별·기능별 등 다양한 성이 존재해 성곽의 박물관으로 불린다. 섬 하나에 성곽 유적이 이만큼 다양하게 많은 곳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본지는 거제지역의 성곽 유적을 통해 선조들이 만들어온 역사의 현장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려 '거제의 성'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봄이면 라벤더 동산으로 수많은 관람객이 북적이는 지세포진성은 계해약조의 역사적 배경이 서린 곳으로 수군진성이면서 산성의 구성요소를 갖춘 문화재다.  / 사진= 류정남 사진작가 제공
봄이면 라벤더 동산으로 수많은 관람객이 북적이는 지세포진성은 계해약조의 역사적 배경이 서린 곳으로 수군진성이면서 산성의 구성요소를 갖춘 문화재다. / 사진= 류정남 사진작가 제공

봄이면 라벤더 동산으로 수많은 관람객이 북적이는 지세포진성은 최근 관광명소로 급부상하고 있다. 오랜 세월 방치돼 있던 성내 휴경지를 활용해 거제시와 선창마을 주민들이 함께 라벤더를 심으면서 입소문과 SNS를 통해 거제의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지세포진성 쪽에서 내려다보는 지세포만과 옥림만은 바다라기보단 호수에 가깝다. 성 주변의 물회 전문점은 잔잔한 바다를 보며 즐길 수 있어 지세포진성에 라벤더가 피지 않아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203호로 지정된 지세포진성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조선의 대일외교에 대해 알아야 한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지세포진은 1441년(세종 23년)에 처음부터 만호진으로 설치됐다. 1419년(세종 1년) 조선이 왜구의 근거지였던 대마도를 정벌한 후 1426년(세종 8년) 내이포(乃而浦) 또는 제포(薺浦)·부산포(富山浦)·울산의 염포(鹽浦) 등 삼포를 개항한다. 하지만 삼포 개항 이후 늘어난 왜인들의 관리가 필요했고, 조선은 1443년(세종 25년) 입국 왜인에게 도서·서계·행장·노인 등의 증명을 지참하고 세견선과 사송선의 제한하는 계해약조를 시행했다.

지세포진은 계해약조를 맺고 시행하기 2년 전 설치돼 개해약조 이후에는 지세포진 주변 일대 바다를 방어하는 일과 더불어 고초도(거문도로 추정)에서 어업하는 왜인들의 문인(文引) 검사·징세(徵稅)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또 지세포진의 만호는 경상도 거제 가라산 목장의 감목(監牧)을 정할 때 제 2소의 감목을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세종대에 설치된 지세포 만호진은 현재 지세포진성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지세포진이 옮겨진 시기는 성종대로 이전에는 일운면 대동마을에 위치했다고 전해진다.

거제문화원의 지명총람 및 고전연구가 고영화 씨에 따르면 대동 마을에는 임진왜란 전까지 객사와 같은 큰 대청을 둔 건물이 있었으며, 대동마을은 본래 큰골 또는 큰몰로 불리던 곳으로 지세포진의 대청이 있어 대동마을이라 했다고 한다.

지세포진성에서 일본 대마도까지 거리는 50㎞ 정도로 지세포진은 대한해협의 척후부터 왜적의 요격, 거제 동쪽의 방어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지세포진성에서 일본 대마도까지 거리는 50㎞ 정도로 지세포진은 대한해협의 척후부터 왜적의 요격, 거제 동쪽의 방어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수군진성이면서 산성인 지세포진성

지세포진성은 수군진성이면서도 체성·문지·건물지·해자 등 산성의 구성요소를 대부분 갖추고 있어 산성이라는 문화재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세포진은 옥포·율포·조라포와 같이 대한해협을 바라보고 설치된 수군진으로 앞서 설명했듯 1471년(성종 2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진성이 지어진 시기는 조선 1490(성종 21년) 10월로 기록돼 있다. 

성종실록과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지세포진성은 둘레가 1605척(330m), 높이 13척(4m)으로 쌓았는데 현재 지세포진성은 'ㄷ'자 모양으로 성벽, 둘레 1096m·높이 3m(최대 폭 4.5m) 규모로 남아 있다. 성벽은 동서 성벽이 짧고, 남북 성벽이 긴 장방형의 형태로 남동쪽 성벽은 훼손이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지만 동문에서 서문까지의 성벽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북벽에서 서벽의 일부분은 복원된 상태다.

해자는 지난 2019년 지세포진성 종합정비계획 중간용역을 통해 발견됐다. 주로 평지성에 사용되는 방어시설인 해자가 성곽 안에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포곡식(包谷式) 산성 형태인 지세포진성에 적용된 것은 특이한 사례로 알려졌다.

1872년 지방지도 거제지세진지도를 보면 성의 모양이 'ㄱ'자 형태로 그려져 있고 그 아래 동헌·사고·이청·교청·선소·선창이 그려져 있으며 대마도가 크게 그려져 있다. 지세포진성에서 일본 대마도까지의 거리는 50㎞ 정도다.

일운면지 등에 따르면 지세포진이 폐진 되기 전까지 성내엔 객사·아사·군기고·군관청·이청·사령청·화약고 등 기와 35칸, 초가 11칸이었지만 신식 군대인 통영수비대에 이관된 이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페허가 됐다고 한다.

거제읍지에 따르면 지세포진에는 만호 1명·군관 10명·진무 7명·지인 7 명·사령 10명·전선(중사좌초관·기패관 5명·도훈도 1명·좌우포도 2명·사부 18명·화포수 10명·포수 24명·타요정수 3명·능노군 120명), 병선(선장 1명·사부 10명·포수 10명·타공 1명·능노군 14 명), 사후선 1(타공 1명, 능노군 4명), 사후선2(타공 1명·능노군 4명)이 주둔했다.

또 영남진지에 따르면 지세포진의 군졸은 모주 223명이고, 아전 11인·군관 11인·통인 2인·사령 5명·사부 18명·포수 24명·화포 10명·봉대군(烽臺軍·봉수군) 5명이 근무했다.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지세포진성으로 가는 길은 해안절벽으로 이뤄져 있어 산길인 '세빗재'를 통해서만 갈 수 있었다.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지세포진성으로 가는 길은 해안절벽으로 이뤄져 있어 산길인 '세빗재'를 통해서만 갈 수 있었다.

일본 사신단의 필수 귀국 루트

지세포는 조라포와 함께 거제도에서 일본과 맞닿은 곳에 위치한 탓에 왜선의 출몰이 많았고 대한해협의 척후부터 왜적의 요격, 거제 동쪽의 방어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던 곳이다.

지세포진성은 지세포 동쪽 끝의 선창마을 뒷산 계곡의 바다로 튀어나온 곳에서 서쪽으로 향해 쌓았다.

현재 지세포진성이 있는 선창마을로 가는 도로가 있지만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지세포진성으로 가는 길은 해안절벽으로 이뤄져 있어 산길인 '세빗재'를 통해서만 갈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지세포진은 조선통신사의 출발 및 기착지이기도 했다. 조선통신사의 주경로는 부산에서 출발해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가는 것이었지만 각종 문헌에 통신사의 귀국 경로에서 지세포를 통해 귀국했다는 사례가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지세포진은 다른 수군진과 마찬가지로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폐진될 때까지 운영됐다.
지세포진은 다른 수군진과 마찬가지로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폐진될 때까지 운영됐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지세포진성의 성주인 지세포 만호 한백록은 이순신 장군 등과 함께 옥포해전과 한산대첩에서 큰 공을 세우지만, 이후 한산대첩에서 입은 상처로 전사했고 지세포진성은 임진란 초기 1년을 제외한 나머지 6년 동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백록의 전사 이후 지세포 만호 강지욱(姜志昱)은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싸우다 패해 성을 함락당했고, 임진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인 1604년(선조 37년)에는 지세포 수군만호진이 옥포의 조라포(助羅浦)에 속하게 된다.

지세포진성은 임진왜란 후인 1603년(선조 37년)에 옥포 북쪽으로 이동됐다가 1651년(효종 2년)에 다시 지세포로 옮겨졌고, 1711년(숙종 37년) 만호를 다시 배치하게 된다. 지세포진은 다른 수군진과 마찬가지로 1895년(고종 32년) 갑오개혁으로 폐진될 때까지 운영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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