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의 성(城)7】 경상남도 기념물 제109호 '가배량진성'
오아포였고 통영이었고 지금은 가배량이 된 조선수군의 요새

가배량진성 동쪽 성곽
가배량진성 동쪽 성곽

거제지역의 고지도를 보면 '구통영(舊統營)' 또는 '고통영(古統營)', '구우수영(舊右水營)'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 지명은 모두 현재 동부면 가배리를 가리키는 지명들이다.

가배량진은 원래 통영시 도산면 오륜리 일대(당시 고성지역)에 설치됐으며, 이후 경상우도의 수군 방어체제가 변함에 따라 계속 이진됐다. 처음 고성에 만호진으로 설치된 가배량진이 옥포로 이진된 후 오아포(현재 가배량)로 다시 옮겨진 것이다.

가배량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임진왜란 이후 통제영이 오아포에서 현재 통영시 두룡포로 옮기면서부터다. 

가배량진성은 성종19년(1488) 6월 경상우수영수군절도사영성(慶尙右水營水軍節度使營城)으로 축조를 시작해 성종22년(1491)에 완성됐다. 

영남읍지(嶺南邑誌)에 따르면 가배량진이 보유한 선박과 관원은 전선 1척·병선 1척·사후선 2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관원은 만호 1인·군관 20인·진무 15명·지인 7명·사령 10명·전선(기패관 5인·도훈도 1인·좌우포도 2인·사부 18명·화포수 10명·포수 24인·타료정수 24명·능노군 120명)과 병선(병선장 1인·사부 10명·포수 10명·사공 1인·능노군 14명) 및 사후선(제1선: 타공 1인·능노군 4명, 제2선: 타공 1명·능노군 4명) 등이 배치된 조선 수군의 요새였다.

1872년 지방도 가배진지도를 보면 배량진의 내·외부시설은 군관청(軍官廳)·남망봉대(南望烽臺)·내아(內衙)·동헌(東軒)·무사청(武士廳)·변고(邊庫)·사령방(使令房)·사창(社倉)·삼문로(三門路)·어변소(禦邊所)·이청(吏廳)·전정(殿庭)·포수청(砲手廳)·화약고(火藥庫)·화포청(火砲廳) 등이 있으며, 그외 주산당(主山堂)·해문수구(海門水口) 등이 표시돼 있다.

이때 성곽은 표시돼 있지 않은 것으로 미뤄 보아 당시에는 이미 가배량진의 성곽이 대부분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가배량진성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하게 남아있는 남쪽 성곽.
가배량진성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하게 남아있는 남쪽 성곽.

이순신 장군의 증축, 사라져버린 만경루·청해루·임해루

현재 남아 있는 가배량진성의 성곽은 350m·높이 3m 정도로 동남쪽 체성(250m)이 가장 잘 남아 있다.

성종 때 처음 설치한 가배량진성은 성벽은 둘레 267(883척)·높이 4m(13척(尺)정도였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이후 둘레 794m(2620척)·높이 13척으로 증축됐다.

가배량진성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돼 한산도에 통제영 본영을 구축하고 오아포 성을 증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전인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가배량성의 둘레는 794m(2620척)으로 기록돼 있고, 1659년 간행된 동국여지에는 1097m(3620척)로 기록돼 경상우수영 및 가배량진성으로 사용되던 당시 원래 성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가배량진성 1872년에 제작된 고지도
가배량진성 1872년에 제작된 고지도

가배량진은 가배리 일대를 둘러싸고 반원형으로 형성된 능선의 안쪽 편평한 분지에 중심을 두고 주위 능선을 살려 진성을 설치했으며, 만경루·청해루·임해루 등 세 개의 누대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동벽 부분에만 추정 누대와 주춧돌이 남아 있다.

가배리 일대는 남쪽이 경사가 심하고, 북쪽이 완만하다. 또 가배리 아래쪽으로 뻗은 반도에 해발 203m에 이르는 안산이 있는 등 높게 솟은 산지가 있어 정찰을 하기에 좋았을 것으로 보인다.

가배량진의 선소는 길게 돌출된 두 개의 반도 사이 형성된 만(灣)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만(灣)은 남서쪽으로 트인 입구를 제외하면 삼면이 막혀 있다. 입구 앞쪽으로 추봉도가 위치해 풍랑의 영향이 적어 안쪽에 마련된 선소에 배를 정박하기 좋은 장소다.

가배량진은 견내량을 지나 한산도를 중앙에 두고 통영과 거제로 갈라지는 두 갈래 바닷길중 거제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율포진과 같이 선박의 출입구가 거제도 외해 서남쪽을 향해 열려 있어 견내량과 거제만 일대를 방어하기 적합한 곳이다. 이순신 장군에 의해 한산도에 설치한 군영에 못지않을 규모로 확장된 것만 봐도 가배량진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가배량성은 1597년 2월 이순신 장군이 파직되고 3월에 통제사가 된 원균 장군이 통제영을 옮기면서 7개월 동안 통제영으로 사용했다. 칠천량패전 이후 전략상 전라도의 고하도·고금도로 통제영이 옮겨졌고, 1601년 다시 가배량에 설치됐다가 이듬해 춘원포(통영 광도면)으로 옮겨졌다.

2020년 거제시의 가배량진성 종합정비계획도.
2020년 거제시의 가배량진성 종합정비계획도.

가배량진은 다른 수군진과 마찬가지로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폐진되기 전까지 형태를 유지했었다. 하지만 폐진 이후의 모습은 1915년께 제작된 지적원도 정도로만 확인해 볼 수 있다.

현재 가배량진의 남아 있는 흔적은 동문에서 남벽까지의 구간과 북벽에서 동벽의 구간 정도다. 가배리 509번지 일대에 망대터가 남아 있으며, 망대 터 안에 주춧돌로 추정되는 석재(가로 115㎝·세로 75㎝)가 남아 있다.

가배량진성의 성벽에는 6개의 치가 발견되고 있는데 북벽에서 동문 구간에 2개, 동문에서 서벽이 끊긴 구간까지 4개가 발견되고 있다. 또 남동벽 상단에서 여장의 흔적(너비 1m)과 해자(隍)가 북서벽·남서벽 근처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해자 폭은 5.7m·높이 2.9∼3m이다. 남서벽 해자는 폭 7.7m·깊이 2.2m 정도다.

가배량진성 근 지역은 성을 은폐하기 위해 조성했다는 남방숲과 승마·무술을 가르쳤던 승마장, 임진왜란 당시 탄화를 만들고 각종 무기를 수리하던 불묵개(가배리 678-3번지 일대)를 비롯해 무기를 만들던 불묵골·송장터·동문·성밖·비석거리·망산·동방산 봉화터 등 임진왜란 및 가배량진과 관련된 지명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외에 가배리 311-17번지 내에 하마석으로 전해지는 석재 2개와 북벽 부근 민가(가배리 229번지)에 글씨가 닳아 없어진 만호비, 두 개의 우물도 여전히 옛 가배량진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다.


※참고 자료= 거제시지, 섬길따라피어난이야기 꽃, 2020 거제시 가배량진성 종합정비계획 수립 학술연구, 2016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조선시대 수군조사 경상우수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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