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의 성(城)13】 거제시 둔덕면 '둔덕기성'
거제역사의 발원지 둔덕과 신라의 군현 편제

거제 둔덕기성이 폐왕성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일제의 고적 조사 및 문화말살정책 때문으로 .국가사적 승격 이후에야 제 이름을 찾게 된 둔덕기성의 명칭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거제 둔덕기성이 폐왕성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일제의 고적 조사 및 문화말살정책 때문으로 .국가사적 승격 이후에야 제 이름을 찾게 된 둔덕기성의 명칭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거제는 삼한시대에는 두로국(瀆盧國), 삼국시대에는 상군(裳郡), 통일신라 경덕왕대 군현제 개편으로 거제군(巨濟郡)이라는 현재 지명을 얻었다.

삼한시대 거제의 독로국은 가야에 병합되고,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키면서 거제는 신라의 영역이 됐다.

이와 관련해 6세기 중·후반에 거제지역에 조성된 고분은 신라가 거제지역의 지방세력를 흡수하는 과정으로, 7세기 전반에 주요 거점에 산성을 쌓은 것은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둔덕면 지역이 거제역사의 발원지라 불리는 이유도 역사가 과거 사실들에 대한 인식 및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거제도에 축조된 성곽은 20여곳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그 많은 성곽 유적중 국가에서 관리하는 곳은 사적 제590호 둔덕기성이 유일하다.

둔덕면 거림리 산95번지 일원, 우두봉 줄기에 평면 타원형 테뫼식 산성으로 만들어진 둔덕기성은 남북 길이 약 200m·동서 길이 약 125m로 전체 산성의 둘레는 약 526m다.

둔덕기성 집수지인 연지는 지름 16.2m, 깊이 3.7m에 달해 16만 6000ℓ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대규모 집수시설로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유물 수백 점이 발굴됐다.
둔덕기성 집수지인 연지는 지름 16.2m, 깊이 3.7m에 달해 16만 6000ℓ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대규모 집수시설로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유물 수백 점이 발굴됐다.

둔덕기성 서쪽은 견내량과 통영을 마주보고 동쪽은 옛 둔덕면의 중심지역인 거림리와 방하리 들판을 마주하고 있다.

신라 산성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둔덕기성은 지난 2010년 국가사적 승격 이후 일부 성곽이 복원됐다. 복원된 체성과 원래 성벽의 형태를 보면 원래 체성 부분은 배흘림기둥과 같이 약간 튀어나온 듯 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는 적군이 성벽을 쉽게 오르지 못하게 만든 고대 성곽의 축성기법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 2007년 복원·발굴된 집수지인 연지는 지름 16.2m·깊이 3.7m에 달해 16만6000ℓ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대규모 집수시설로 알려졌다.

연지는 원형의 단면 계단식으로 북쪽은 4단, 동·서·남쪽은 3단으로 축을 쌓았는데 집수지가 성곽의 초축 시기 및 수축 시기와 같다는 점도 흥미롭다. 연지는 발굴 당시 뻘층에서 토기와 청자 접시·기와·청동그릇 파편·화살촉·구유·멍에·괭이·나무망치·소뼈 등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 수백점이 발굴됐다.

또 연지 바닥층에서 찾은 청자상감입문매병은 12세기 중·후반의 유물로 의종의 유배와 관련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둔덕기성은 1995년 둔덕면 거림리에 위치한 거제고군현치소지에서 처음 발견된 '상사리(裳四里)' 명문기와가 또다시 발견돼 거제가 가야에서 신라로 편입된 이후부터 고려 시대까지 거제지역의 치소성(治所城) 역할을 했다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둔덕면 거림리 산 95번지 일원, 우두봉 줄기에 평면 타원형 테뫼식 산성으로 만들어진 둔덕기성은 남북 길이 약 200m, 동서 길이 약 125m로 전체 산성의 둘레는 약 526m다.
둔덕면 거림리 산 95번지 일원, 우두봉 줄기에 평면 타원형 테뫼식 산성으로 만들어진 둔덕기성은 남북 길이 약 200m, 동서 길이 약 125m로 전체 산성의 둘레는 약 526m다.

'폐왕성' 아닌 '둔덕기성'이라 불러야

인터넷 검색은 물론 둔덕기성을 설명하는 각종 문서나 논문, 심지어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제작한 관련 책자나 표지판 등에는 '폐왕성(廢王城)'이라는 명칭을 쉽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둔덕기성이 폐왕성으로 불리게 된 배경이 일제의 고적조사 및 문화말살정책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사용을 자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폐왕성(廢王城)'이란 명칭이 우리나라에서 널리 부르게 된 시기는 둔덕기성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11호에 지정된 1974년 2월16일 이후부터다.

하지만 지역민들은 오래전부터 둔덕기성을 피왕성·기성·토성 등으로 불렀다. 더구나 신증동국여승람(1530년)·동국여지지(1656년)·여지도서(1757년∼1765년)·증보문헌비고(1903년~1908년), 영남읍지(1895년), 거제군읍지(1899년) 등 조선시대 어느 기록에서도 폐왕성은 찾아볼 수 없다.

폐왕성이란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31년 11월 진해요새사령부의 검열을 거쳐 발간된 '경남의 성지(慶南の 城址)'라는 자료다.

경남의 성지는 일제가 관할구역내 왜성을 조사·연구하기 위해 당시 경상남도 지역의 왜성과 인근의 역사적인 성에 대한 여러 관련 자료를 모은 자료집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거제도에 축조된 성곽은 20여 곳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그많은 성곽 유적 중 국가에서 관리하는 곳은 사적 제590호 둔덕기성이 유일하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거제도에 축조된 성곽은 20여 곳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그많은 성곽 유적 중 국가에서 관리하는 곳은 사적 제590호 둔덕기성이 유일하다.

이 자료 53페이지의 지도에는 둔덕기성을 '기성'으로 표기했다가, 54페이지 세부기록에는 둔덕기성의 명칭을 '폐왕성'으로 변경해 놓고 '고려 의종때 축성, 고려 의종이 패해 거제도로 유형(流刑)왔으며 당시에 축성 한 것'이라고 기록해 놨다.

또 경남의 성지에는 오량성과 구분해 인근 지역에 '피왕성(避王城)'이라는 성이 있는데 정확한 연대 등을 알 수 없다고 기록했다.

이후 폐왕성이란 명칭은 일제의 검열 아래 1934년 만들어진 '통영군지'와 1937년 만들어진 '둔덕면세개요'에 고스란히 인용됐다. 둔덕기성이라는 이름은 국가사적으로 승격되고 나서야 제 이름을 찾게 됐다.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배우고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곡된 역사와 명칭은 되돌리고 바로잡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