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제의 성(城)16】경상남도 기념물 제205호 '구영등포진성'
삼포왜란과 임진왜란에서 격전을 치른 구영등포진성

거제 북쪽에 설치된 구영등포진성은 거제와 부산 내해에서 전해와 견내량으로 이어지는 경상도 연안항로의 입구를 막는 요충지였다. /사진= 최대윤 기자
거제 북쪽에 설치된 구영등포진성은 거제와 부산 내해에서 전해와 견내량으로 이어지는 경상도 연안항로의 입구를 막는 요충지였다. /사진= 최대윤 기자

조선은 건국 후 무질서하게 입국하는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부산포(富山浦)·내이포(乃而浦·일명 薺浦 : 熊川)·염포(鹽浦) 등 삼포를 개항하고 왜관(倭館)을 설치했다.

하지만 왜관의 일본인들의 법규위반과 왜구에 의한 약탈행위가 조금씩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조선은 일본인들에게 엄격한 교역 통제정책을 시행했다.

조선의 정책에 왜인들의 불만은 높아져 갔고, 1510년(중종 5년) 4월4일 제포 항거왜인의 두목과 대마도 세력을 중심으로 한 4000~5000명의 병력은 거제도 영등포를 공격한다. 삼포왜란의 서막이 영등포진에서 시작된 것이다.

건국 이후 조선은 고려말 왜구의 출현으로 연해 지역의 소규모 군현의 백성수가 적어 군현이 폐지되는 곳이 많아 이 지역 수군을 동원해 개간하는 정책을 펼치는데 영등포진도 이때 수군진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 원년에 자산도(玆山島)로 옮긴 영등포 만호를 다시 영등포로 옮기자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를 보면 영등포수군진은 세종 이전에 이미 설치됐고, 세종 원년 자산도에서 다시 영등포로 옮겨진 것을 알 수 있다.

문종 때에는 영등포에 목책을 설치하게 되는데 '문종실록'에 따르면 영등포는 왜적이 가장 먼저 닿는 곳으로 목책을 설치하자는 주장에 따라 추수를 기다려 만들게 했다. 이후 1485년(성종 16년)에는 영등포진에 보가 설치되고, 1490년(성종 21년)에는 진성이 완성된다.

영등포는 대한해협을 건너 진해만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해 왜적의 침입이 빈번했는데 중종 때는 삼포왜란으로 영등포진이 함락된다고 알려져 있다.

구영등성 성곽중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한 북쪽 성곽. 안쪽은 민가와 교회건물이 위치해 있으며, 옹성은 형태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훼손돼 있다. /사진= 최대윤 기자
구영등성 성곽중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한 북쪽 성곽. 안쪽은 민가와 교회건물이 위치해 있으며, 옹성은 형태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훼손돼 있다. /사진= 최대윤 기자

그러나 1895년 만들어진 '거제군읍지(巨濟郡邑誌)' 선생안에는 당시 영등포 만호이자 훗날 거제 현령인  오세한(吳世翰)은 삼포왜란 때 왜구를 물리치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포왜란 이후 영등포진은 제포 첨절제사를 혁파하고 영등포 만호를 첨절제사로 승격시켜 거진(巨鎭)으로 만들었지만 1541년(중종 36년) 왜적의 갑작스런 기습으로 영등포 만호만 살아남는 일까지 발생한다.

영등포진은 임진왜란 때에도 거제지역에서 가장 먼저 왜적에게 점령당한 수군진성으로, 왜군은 영등포진성 뒷산에 왜성을 쌓고 영등포를 왜군의 거점으로 활용하기까지 한다.

당시 만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옥포해전 당시에는 영등포 만호 우세적(禹世績)이 선봉을 섯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영등포진은 거제 서쪽으로 이진한다. 1623년(인조 원년) 견내량으로 이진했다가 1750년(영조 26년)에 혁파된 기록이 여지도서(輿地圖書)·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영남읍지(嶺南邑誌) 등에 남아 있다.

영등포진은 1756년(영조 32년) 통제사(統制使) 이경철(李景喆)의 주장으로 다시 한번 소비포진의 권관(權管)을 영등진으로 옮겨 만호로 승격시켜 설치·운영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운영된다.

구영등성의 서벽. 성곽의 형태만 겨우 유치된 상태다. /사진= 최대윤 기자
구영등성의 서벽. 성곽의 형태만 겨우 유치된 상태다. /사진= 최대윤 기자

흔적만 겨우 남은 구영등포진성...흔적도 없는 신영등진

최초의 영등포진은 장목면 구영리 일대에 설치된다. 구영(舊營)이라는 이름은 인조 때 영등진을 둔덕면으로 옮기면서 구영등 또는 구영이라고 부르면서 지금까지 지명이 남은 상태다.

구영등포진은 진의 뒤쪽에서 뻗어 나와 좌우로 갈라지는 산줄기 사이의 좁은 평야에 위치해 있어 가덕도·천성진·가덕진·제포진과 마주보는 곳에 위치해 부산 내해에서 진해만과 견내량으로 이어지는 경상도 연안항로의 입구를 막는 요충지다.

거제의 구조라·옥포·지세포진이 외해(外海)에서부터 왜구를 막는 곳에 위치했다면, 영등포진은 내해(內海)에서 왜구를 사전에 차단하는 관문으로 조선 초부터 일찌감치 수군진을 설치하고 운영하게 된 것이다.

1469년에 쓰여진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는 구 영등포진에는 병선이 7척이고 군병이 없는 병선이 6척이 있으며, 승선하는 군사는 700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구영등성 모습. /사진= 최대윤 기자

당시 거제현을 방어하는 병력이 기병 80명·보병 133명 수준인 것을 고려하면 조선이 영등포진의 방어에 적잖은 공을 들인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폐전진 직전인 1894~1895년 사이 만들어진 '영남읍지(嶺南鎭誌)'에 기록된 영등포진의 병력은 조선 초기와 많이 다르다.

영남진지 기록에는 영등진(둔덕면 학산리 일대)에는 전선 1척·기패관 1인·도훈도 1인·사부 18명·화포수 10명·포수 24명·능노군 125명이다. 병선은 1척으로 병선장 1인·사부 10명·포수 10명·능노군 10명이다.

1사후선은 1척으로 능노군이 5명이다. 2사후선은 1척으로 능노군이 5명이다. 사환선(使喚船)은 1척으로 수군훈련(水操) 때 왜선(倭船)을 가장한 배로 당포(唐浦)를 회항(回航)한다고 돼 있다.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205호로 지정돼있는 구영등포진성은 진해만을 바라보는 북문이 마을로 이어지는 길 입구에 반원형 편문 옹성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형태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있고 성벽 위는 교회와 주택이 들어서 있다.

임진왜란 때 영등포진성은 왜군이 함락 후 영등포진성의 외성(外城)으로 사용했다고 알려졌는데, 주민에 따르면 마을 중앙 왜성 모양을 한 곳은 원래 영등포진의 만호가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영남진지에 따르면 신영등진은 진의 부지(鎭座)와 전우(展宇) 3칸은 동쪽을 등지고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동헌(東軒) 3칸, 내아(內衙)가 3칸이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현재 신영등진은 동헌이 있던 '아사(衙舍)'라는 마을 이름이 남아 이곳에 동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1873년 지방지도에 기록된 우물만 겨우 찾을 수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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