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구릿빛 쇠 옷을 입고 성글게 손뜨개질한 털목도리를 두르고 앉았다. 곁에 놓인 빈 의자는 누구를 위해 비워두었는가. 노랑나비만 청산을 찾아 바다를 건너온다. 봄날이 저리도 따뜻한데 맨발로 한데 나앉은 소녀가 애처롭다. 어깨에 내려앉은 새를 파랑새라고 부르지 않으련다. 소녀를 태우고 구만리를 날아다니게 붕새였으면 좋겠다. 누군가 소녀에게 꽃을 선물하고 갔다. 오뉴월 땡볕에도 시들지는 않고 눈이 내려도 얼지 않는다. 꽃을 갖다 바친 소녀는 3교시 역사(歷史)시간에 소녀를 만났을 것이다. 검정치마, 하얀 저고
건너편 저수지는 늘 만수(滿水)다. 물이 흔한 동네라서 농사에 쓰이기보다는 산불 진화하는 소방 헬기의 소화수로서의 역할이 더 막중하다. 빨간 소방 헬기가 수면 가까이까지 내려와 커다란 물주머니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날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우기인 요즘은 든 물 만큼 넘쳐 내보내는 수문만이 제 몫의 일을 하고 있다. 저수지 뚝 아래 넓은 들은 주거 제한 구역이다. 건축 허가가 날 리 없으니 논과 밭뿐이고 해를 가릴 큰 나무도 없다. 주말이면 민물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저수지 둘레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지만 평소에는 물새들만
어머님.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동녘 하늘엔 샛별이 찬란합니다. 당신께선 늘 첫 닭이 울던 이 시간에 일어나 두부를 만들어 저자로 달려가곤 하셨지요. 이 불초자식도 아침 일찍 일어나 분주하게 일하시던 어머님을 닮아 차츰 새벽형 인간으로 변했습니다. 복사꽃 피고 동박새 우짖는 이맘때면 이 아들은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님 생각에 사무칩니다.어머님.춘삼월, 이 좋은 계절에 어머님의 애환과 고달픈 삶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고향의 고갯길과 언덕배기와 둑길과 갯가를 돌아보면서 호강한번 제대로 못하시고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했습니다. 옛날 같으면 상
참 많은 일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일어났다. 몇 개월의 시간이 정지된 듯했지만 가혹하리만큼 많은 것들을 거둬가고 있다.스치는 것마다 무엇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몹쓸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이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진행 중이다.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야만 끝이 날까. 아직도 빼앗아 갈 것들이 남았을까?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의 오만함을 깨치려 하는 신(神)의 단죄(斷罪)라면, 충분히 깨닫고 반성했으니 제발 이제는 끝을 내어 달라고 이 세상의 모든 신에게 엎드려 간절히 기도드리고 싶은 심정이다.여기저기 봄꽃 축제들이 취소됐다. 특히
'맛의 섬'이면서 '방시순석' 이야기가 있는 이수도를 아시나요?거제시에는 바닷물이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뜻의 섬 이수도가 있다. 이 섬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두루미의 형상을 하고 있어 '학섬'이라고도 불려졌다. 이 섬의 이웃으로는 바다를 경계로 선착장이 있는 시방마을이 있다. 이 두 마을의 언덕에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특이한 비석이 있는데, 그 연유는 뭘까.이수도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섬 일주다. 숲의 싱그러움 속에서 바다를 조망하며 걷고, 섬에 산다는 꽃사슴도 찾아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눈부시게 매혹적이던 하얀 목련의 자태는 찾아볼 수 없고 꽃잎은 애처로이 매달려 칙칙한 갈색 빛만 띄고 있다. 향기를 잊은 지도 오래다. 떨어진 꽃잎은 형태마저 사라져간다. 해마다 어김없이 꽃을 피우지만, 목련꽃을 볼 때면 알 수 없는 애잔함이 묻어나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 만지면 금방 상처날 것 같은 그 부드러운 촉감 때문일까.한식을 맞아 아버지 산소도 들릴 겸 고향집을 찾았다. 오랫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던 집은 많은 것이 변하여 어릴 적 내가 뛰어놀던 집이 아닌 듯 낯설다. 우물가 옆 사철나무 한 그루만이 새로 돋아난 연
여태 왜 보지 못했을까? 조각공원 산책길을 다닌 지도 십년이 지났을 텐데 오늘에사 위세복 작가의 '새벽을 열다'라는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다각형의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구(球)인데 앞에 서면 면이 서로 반사되면서 수없이 많은 나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숱하게 이 앞을 지나다녔건만 이렇듯 신비스런 연출을 본 것은 오늘 처음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했지. 관심이 있는 작품이 아니면 예사로 스쳐지나가는 일이 나도 거기서 거기일 뿐이다. 칠십여 년을 살아온 세월이 시들한 탓인지 많은 일에 무관심하고 무
검색대를 지나고 여권 심사도 마쳤다. 면세 구역 진입. 이곳에 왜 상가가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진열품도 나라마다 태반이 같아 시들하다. 그래도 어슬렁대다 숙제를 마친 듯한유함을 즐긴다. 이민국을 지날 때의 긴장이 풀리며 무풍지대에 안착한 안도감을 맛본다.면세 지역과 탑승구 지역. 여기선 국제법이 운용되는 것도 같고 법망을 벗어난 곳 같기도 하다. 까닭 없이 편하다. 소속감도 계절도 감지할 수 없는, 일상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공간이다.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곳만이 아니다. 자국, 이국도 아닌 정체 모호한, 별세계 같다.
저만치 방음벽이 보인다. 서너 걸음만 더 가면 또 만나게 되겠지. 차라리 눈을 감는다. 왔던 길을 뒤돌아서 다른 길로 갈까. 설마 오늘은 별 일 없겠지. 출근 때마다 항상 이 자리만 오면 멈칫거린다.쓸데없는 고민을 하면서도 매일 아침 이 도로를 걷는다. 차량도 많지 않은데다 한적하고 깨끗해서다. 밑에 위치한 아파트 옆을 따라가면 이보다 더 좋은 오솔길도 있는데 꼭 수행자의 구도처럼 이곳을 들어선다.아마도 볕이 좋아서 이 길을 선호하는 것 같다. 새로 난 포장로를 끼고 있는 길이라 가로수도 큰 건물도 없다. 햇살에 그늘이 없어서 겨울
아홉 시 뉴스. 오늘도 여야끼리 논쟁이 뜨겁다. 늘 그렇듯이 한쪽이 공격하면 한쪽이 되받아친다. '핑퐁게임'이다. 타 방송을 돌려봐도 떠드는 건 마찬가지다. 정쟁의 소용돌이 끝에 임명된지 한 달도 못된 정치인이 낙마한다는 속보가 뜬다.그놈의 돈이 문제였을까. 우리 같은 서민들이야 그들의 거래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쳐놓은 그물에 왕거미가 수거를 시작한다. 시사평론가의 신들린 달변이 기승을 부리고도 남을 일이다. 세상은 요지경이라고 했듯이 정치도 요지경속이다. 서민인 우리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건지.6
꽃에 베이다니. 꽃이 사람 마음을 베이게 한단다. 화엄사에 사는 홍매 한 그루가 하도 붉어서 검은색이 돌아 흑매란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보는 순간 마음이 쓰윽 베인다고 한다. 그 얘기를 처음 듣자마자 피가 온몸을 한 바퀴 돌며, 마음속에 그 나무가 쑤욱 들어섰다. 조선 숙종 때 계파선사가 각황전을 중건하면서 기념으로 심었다는 홍매 한 그루. 어리고 착한 뿌리 하나가 터를 잡아 삼백 년을 훌쩍 넘겼다고 한다. 기나긴 세월을 제 자리를 지키며 견뎌낸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 꽃을 피운다는 의미를, 나는 오래된 삶에게 묻고 싶었다. 산문을
왜소한 몸매의 그녀가 우산을 접으며 아파트 현관에 들어섰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파리해 보였다. 허둥지둥 서둘러 나가야 했던 일은 묻지 않아도 알만하다.남매를 다 결혼시켰으니 홀가분하게 자신의 시간을 즐기며 인생 이모작을 꿈꾸는 나이건만 그녀에게 잠시도 한유한 시간은 없다. 같은 라인에 사는 친구의 권유로 등록한 복지관 취미교실에도 간 날보다 빠진 날이 더 많다. 그녀가 남보다 게으르거나 의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계획과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그리고 시집간 딸 때문이다. 다른
칠천도 앞바다는 잔잔하다. 무심한 바다와 나는 어느새 하나가 되어있다. 찻잔을 들어 그에게 구수한 커피 내음을 전하며 하루를 열어본다.얼마 전에, 잡초가 너무 무성하여 낫으로 잡초를 제거한 적이 있었다. 깨끗한 화단이 조금 허전하여, 코스모스를 조금 심었다.비를 맞아서인지 대충 심어 놓은 코스모스가 꽃을 피우고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어 자연의 생명력이 참 놀랍다는 생각을 했다.2주간 비가 계속해서 내렸다. 그 새 잡초는 또 이만큼이나 자라 있다.'뭔 잡초가 이렇게 잘 자라지, 이러니까 잡초라고 하는 모양이지'혼자서
"안녕하셔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이 말은 상큼하면서도 기분 좋은 말이다. 평범하지만 일상의 삶에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소통의 열쇠이다.입학식, 캠퍼스에 연둣빛 젊음이 흠씬 묻어난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늘 처음처럼 새롭고 설레며 긴장된다. '지금까지 이런 신입생은 없었다', '간호학과, 처음이지?' 교정에 걸린 선배들의 격려 플래카드가 정겹다.축사에서 "맨발로 걷기만 해도 멋진 청춘이니,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는 청춘이 되라.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면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을
고향. 말만 들어도 아련한 향수가 묻어나는 곳이다. 우수(雨水)가 겹친 정월대보름날, 그리운 고향을 만났다. 거제에 봄은 왔건만, 양광(陽光)은 먼 듯 바람이 찼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타향에서 오래 살아봐야 실감이 난다. 사실 애타게 가고 싶어도 막상 가기 힘든 곳이 고향이다. 무엇보다 얼었던 대동강도 풀린다는 우수가 겹친 정월대보름의 방문은 감회가 새롭다. 상문동이 주최하는 '대보름 달집태우기' 행사에 초청됐고, 마침 부산에 행사가 있어 일정을 마치고 거제로 향했다. 차창 너머로 다가오는가 싶더니 속절없이 멀어지
주민들의 칫솔에 대한 요구도가 점점 높아진다. 그동안 해마다 해왔던 행사가 메르스, 세월호, 콜레라 터지고 이런 저런 국가 재난과 바이러스 퇴치로 행사에 적신호가 들어 오면서 계속 중단 될 수 밖에 없었다.“아, 행사를 통해서 홍보하겠습니다.”그렇게 안내하고는 행사 준비를 해 본다. ‘체험교실을 할까?’,‘체험 마당을 할까?’제목부터 고민이다.날짜와 장소를 정해야 한다. 장애인협회 행사도 겹치고, 추석 연휴로 대목에 들어가니, 보건소로 칫솔 받으러 올 것 같지는 않고
들어 선 거실이 어둡다. TV를 보고 있던 남편에게 짜증을 냈다. "나는 거실이 환 한 게 좋아! 근데 당신은 불을 안켜고 TV를 보더라. 나는 당신이 내 말을 안들어서 짜증나!""왜 그래? 나 혼자서 TV 보는데 굳이 불 켜야 하는 이유가 있어?""나는 집안이 환한 게 좋다고 했잖아. 밖에서 들어 올 때 집이 환한 게 좋단 말이야.""혼자 있는데 전기요금 폭탄 맞을 일 있어? 알뜰 주부는 다른데서 찾아!"밖에서 들어와서 한다는 소리가 쌩뚱맞다는 표정으로 남편은 나를 쳐다봤다. 남편 말이 맞는 것 같은데도 마음속에서는 화가 나는 이
중국 윈난의 뤄핑에서 차로 열두어 시간, 내린 곳이 웬양이다. 띠띠얀(다랑이 논)으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유명 관광지다. 특히 사진작가들이 떼로 몰려든다. 논에 물이 받혀있는 시기에 관람객이 유독 많다. 저녁인데도 인산인해다. 빼어난 곳이라니 혼잡한 것쯤은 참기로 했다. 해가 떠오르는 순간의 장관을 놓치지 않으려면 어둑새벽부터 나서야 한다기에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규모에 압도되고 빛의 아름다움에 환호했다. 특히 일출, 일몰 풍경이 대단하다. 대자연의 쇼가 펼쳐진다. 햇빛에 반사되는 물빛의 현란함. 태양의 각도에 따라 변화
시골에 살다보면 지천으로 밟히는 게 흙이다. 그런 흙에서 저토록 아름다운 자태와 고운 빛깔을 가진 그릇이 만들어진다니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도자기 그릇을 보면 눈길이 오랫동안 멈춰진다. 도자기 중에서도 투박한 분청사기 찻잔을 좋아하지만, 질박한 찻잔에 있는 '살금'을 특별히 좋아한다.형태를 잡은 태토에 유약을 발라 1300℃의 불가마에서 달궜다가 식히면 '쩌정쩌정' 마치 얼음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로 그릇은 울기 시작한다. 일찍이 추사는 찻물 끓는 소리를 '대밭에서 우는 바람소리
나는 말을 잘 못한다.생각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데 입으로 즉각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책없는 병적 말더듬은 아니지만, 한마디 하려고 하면, "음∼ 어∼" 하면서 항상 반박자가 늦다. 그래서대화중에 상대의 말을 듣기만 하는 경우가 많으며 막상 대답이나 반론을 펼칠라치면 말꼬리를 잡혀 버린다. 소가 여물을 되새김질 하듯 말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시기를 놓치고 그냥 꿀꺽 삼켜버리고 만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고개만 주억거리는 모습이 나의 자화상이 됐다.부산에서 태어나 자랐던 나는 한때 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