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희 수필가
윤석희 수필가

검색대를 지나고 여권 심사도 마쳤다. 면세 구역 진입. 이곳에 왜 상가가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진열품도 나라마다 태반이 같아 시들하다. 그래도 어슬렁대다 숙제를 마친 듯한유함을 즐긴다. 이민국을 지날 때의 긴장이 풀리며 무풍지대에 안착한 안도감을 맛본다.

면세 지역과 탑승구 지역. 여기선 국제법이 운용되는 것도 같고 법망을 벗어난 곳 같기도 하다. 까닭 없이 편하다. 소속감도 계절도 감지할 수 없는, 일상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공간이다.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곳만이 아니다. 자국, 이국도 아닌 정체 모호한, 별세계 같다. 밝고 투명한 곳, 범죄나 사건이 없는 청정구역으로 인식하며 여기서 갖는 묘한 느낌을 현존하는 외계라고 상상을 하곤 한다.  

배낭을 아무데나 벗어 놓고 이곳저곳 기웃대니 예서부터 자유롭다. 여기가 어디든 상관없다. 그저 신천지에 있다는 착각에 행복하다. 떠났다는 자각만으로도 가벼워진다. 홀가분해서 날개가 펼쳐지는 것일까. 설렘과 기대로 흥분된다. 마음으론 여행의 시발점인 셈이다. 만나는 사람들이 낯설어서 더 살갑다. 관계망을 벗어난 인간 군상들을 바라보는 것도 흥미롭다. 바쁘지 않은 사람들 모습이 여유롭다. 상상만으로 꿈을 꿀 수 있는 곳이다. 

요르단의 암만 공항이다. 두바이를 경유해 테헤란으로 가려한다. 보안 관리팀으로 보이는 자가 황급히 나타난다. 나를 찾아다녔나보다. 손 마이크를 들고 씩씩댄다. 방망이와 총까지  있어 오싹하다. 배낭을 넘겨주며 호통이다. 사건사고 방지책이라나. 점검을 해보란다. 짐을 두고 다니는 게 큰 잘못인가보다. 조심하라 당부가 아니고 엄포 경고다.

하긴 두바이의 돈 냄새를 맡고 몰려가는 사람들이 벌떼 같긴 하다. 남루한 노동자들 행색이라 경계 대상인가보다. 여행자들만 이동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둘러보니 일거리를 찾아 떠나는 자들의 집단 수용소 같다. 테러·도난·마약·귀에 담고 싶지 않은 단어들이 난무한다. 갑자기 혼란스럽다. 여기도 거센 바람이 부는 인간 세상이라지 않나. 겁 없이 너무 무모했었나보다. 엉뚱했던 상상이 산산조각 난다. 

고비사막을 넘는 황사바람도 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바람도 싫다. 도시에서 하수처럼 떠밀려오는 부패한 바람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 인간 무리들이 내는 헛바람소리도 질색이다. 질주 차량들이 내는 미친 바람은 또 어떠한가.

오죽해서 이런 곳이 그리웠나. 그래서 꿈꾸었던 무풍지대. 이젠 세상 어디에도 없나보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나 나가 볼까. 그런 볼썽사나운 바람들을 싸잡아 풍력 발전소나 돌려 볼까. 실은 이곳도 에어컨바람이 빵빵하거나 온풍바람이 쌩쌩한 곳이다. 그래서 덥지도 춥지도 않다. 인간이 조율해 놓은 적정 바람 탓에 무풍지대라 착각을 한 것이다. 

침낭을 펴고 잠들어도 간섭하는 이 없고 팽개쳐진 배낭도 무탈한 곳. 이제 이런 방랑도 접을 때가 되었나보다. 짐 보따리 꾸역꾸역 베게삼아 끌어안고 돈 주머니, 여권 여며 배에 차야 된다. 두 눈 희번덕여 옆 사람 경계하며 나를 지켜내야지. 여기도 안전구역이 아니라니 무지 쓸쓸하다. 세상 바람에 휘청거리고 마는 나는 정녕 갈 곳이 없는 걸까. 아예 모진 모래 바람 불어오는 사막에나 가야하나.

아하. 여기도 사람 사는 세상인 것을, 평화롭지도 않은, 은폐되고 은밀한 곳. 일내고 줄행랑치는 자들이 우글거리는. 비행기 테러 음모가 살벌한 우범지대. 눈 깜빡하자 내 짐에 마약 봉지가 들앉게 된다면, 퍼뜩 정신을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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