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목련
하얀 목련
  • 이은영 수필가
  • 승인 2020.07.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눈부시게 매혹적이던 하얀 목련의 자태는 찾아볼 수 없고 꽃잎은 애처로이 매달려 칙칙한 갈색 빛만 띄고 있다. 향기를 잊은 지도 오래다. 떨어진 꽃잎은 형태마저 사라져간다. 해마다 어김없이 꽃을 피우지만, 목련꽃을 볼 때면 알 수 없는 애잔함이 묻어나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 만지면 금방 상처날 것 같은 그 부드러운 촉감 때문일까.

한식을 맞아 아버지 산소도 들릴 겸 고향집을 찾았다. 오랫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던 집은 많은 것이 변하여 어릴 적 내가 뛰어놀던 집이 아닌 듯 낯설다. 우물가 옆 사철나무 한 그루만이 새로 돋아난 연두 잎을 봄빛에 반짝이며 허전한 마음을 쓰다듬는다. 갖가지 상념을 뒤로한 채 옆집에 살고 계시는 친척 할머니집에 들렀다. 두 달 전, 셋째 딸을 잃고 눈물을 쏟아 내시던 그 날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할머니는 다시 눈물을 하염없이 훔치셨다. 상심한 마음을 어떻게 위로해줄지 몰라 그저 두 손을 잡아드렸다.

나보다 두 살 많았던 언니는 다른 자녀보다 유난히 어질어 이름을 두고 군자라 불리기도 했다. 늘 웃는 얼굴로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피더니, 어느 날 홀연히 세상을 등지고 만 것이다. 언니에게서 배웠던 "목장 길 따라 밤길 거닐어 고운 님 함께 집에 오는데…" 이 노래는 지금도 가끔씩 흥얼거리곤 한다. 

"이불을 항상 펴 놓고 살아."

텅 빈 방에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아 이불로나마 온기를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죽음이 갈라놓은 이별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거기엔 꿈에서조차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아픔만이 있는 것이다.

차 한 잔을 마시면서 마당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큰 목련나무를 본다. 하얀 목련꽃을 피우는 나무다. 저렇게 큰 나무가 옛날에도 저곳에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때는 어렸던 나무가 훌쩍 커 버린 것인가.

"할머니, 목련꽃이 많이 시들었네요."

"며칠 전까지도 참 예뻤는데…."

이 곳의 목련도 그렇게 시들어가고 있었다. 벚꽃처럼 화사하게 날아가지도 못하고 땅바닥으로 떨어진 꽃잎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언제부턴가 나는 하얀 목련꽃이 좋았다. 훗날 하얀 목련의 꽃말이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니! 꽃도 화려한 한 때가 끝나면 가야 할 길을 떠나고, 사람의 일생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 질 것을 알기에 피어 있을 때 더욱 아름답고, 사람의 삶 또한 유한한 것이기에 매 순간이 소중한 것이다. 꽃에게는 시듦의 아픔이 있고, 사람의 삶에는 비켜갈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시듦이 두려워서 꽃 피우지 않을 수 없고, 고통과 시련이 두려워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작은 꽃잎하나도 상처를 안으로 껴안고 있다. 밟혀도 소리 없이 자연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면서.

예전에 아는 동생이 아이를 안은 지인과 인사를 하는데 얼핏 보니 아이 얼굴이 여느 아이와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어딘가 아파 보이는 것도 같았다.

"스무 살 안에 죽는데."

"응? 무슨 말이야?" 

"희귀한 병이래."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 번 지고 나면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도 다시는 피어나지 못할 또 다른 목련꽃 하나. 달리는 차 안에서 조용히 노래를 불러본다. 

"목장 길 따라 밤길 거닐어 고운 님 함께 집에 오는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