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금 터지는 소리
살금 터지는 소리
  • 고혜량 수필가
  • 승인 2018.12.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혜량 수필가
고혜량 수필가

시골에 살다보면 지천으로 밟히는 게 흙이다. 그런 흙에서 저토록 아름다운 자태와 고운 빛깔을 가진 그릇이 만들어진다니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도자기 그릇을 보면 눈길이 오랫동안 멈춰진다. 도자기 중에서도 투박한 분청사기 찻잔을 좋아하지만, 질박한 찻잔에 있는 '살금'을 특별히 좋아한다.

형태를 잡은 태토에 유약을 발라 1300℃의 불가마에서 달궜다가 식히면 '쩌정쩌정' 마치 얼음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로 그릇은 울기 시작한다. 일찍이 추사는 찻물 끓는 소리를 '대밭에서 우는 바람소리'라고 했는데, 그릇의 '살'이 터지면서 '금'을 만드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불협의 휘파람소리를 닮았거나, 아니면 칼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 같지만 그런 건 아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제 살 깎는 소리, 한올 한올 제 몸이 찢겨져 나가는 소리, 아픔을 견디다 못해 소리 지르고 싶지만 안으로 삼키면서 흘러나오는 서러운 소리다. 드디어 울음이 그치고 나면 그릇의 몸에는 살금이 무늬가 돼 나타난다.

빙렬(氷裂)은 절망의 밑바닥에서 내쉬는 한숨이며, 거품처럼 끓어오르던 분노의 앙금이며, 한 밤중 달이 느끼는 외로움이다. 오지 않을 전화를 기다리며 애태우던 순간이며, 미움과 후회와 자책으로 밤을 새웠던 아쉬움이 만들어낸 상처다.

왜 우리의 현실은 이렇게도 춥고 어두운가. 그러나 그 아픔들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흔적이 바로 '살금'이다. '살금'이라는 말이 사전에 있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릇에 생겨난 저 무수한 균열들을 '살금'이라고 부르고 싶다. 분청찻잔의 살금처럼 우리의 삶은 무수한 살금들로 이뤄져 있다. 제 몸 터지는 아픔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그 아픔이 삶의 무늬가 돼 또 하나의 성숙한 침묵을 만들어 낼 것이다.

백자는 가을 김장밭에서 갓 뽑은 무 같은 목선에 태깔 고운 하얀 모시적삼 입고 앉은 단아한 여인이라면, 제 몸에 금이 가도록 울며 태어난 분청그릇은 한여름 땡볕에 농사일을 끝내고 나무 그늘에 앉아 막걸리 한 잔에 목을 축이고 있는 주름진 아버지의 얼굴이다.

살금은 도공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찻잔이든 같은 것이 없다. 사람이 만들려고 해도 그렇게 만들어 낼 재간이 없다. '우연'이라는 이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예술품이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것도 우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종착역을 향해 이미 획정돼 있는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와 같다면 참으로 무미건조 했을 것이다. 우연한 일로 웃고, 우연한 일로 가슴 아팠고, 우연한 일로 가는 길이 바뀌기도 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곳에서 바람이 불어와 가슴을 뻥 뚫어놓기도 했다. 거기다가 우리의 영혼은 또 얼마나 흔들리며 살았는가. 그러나 우연하게 만들어진 분청그릇의 빙렬이 분청을 분청답게 하듯,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살금들이 나를 나답게 익어가게 만든다.

살금은 그 속에 때를 끼운다. 흔히 차심(茶心)으로 불리는 거무스레한 때다. 이 때가 다기(茶器)의 역사를 일러주고 있다. 더러는 찻잔에 때가 끼었다고 게으른 주인을 탓할지 모르지만, 찻잔은 때가 많이 낄수록 차향이 짙어진다. 차심은 참으로 오랫동안 느릿함으로 채워놓은 것이기에 차맛은 바로 이 때 낀 차심에서 우러난다. 이 차심의 때는 분청그릇이 가마 속을 나오면서 생긴 균열을 단단하게 메워주는 역할을 한다. 때론 너와 나 사이에 생겨난 틈을 말끔하게 메워주는 것도 대단한 것이 아닌 차심 같은 때일 것이다.

오늘 저녁은 때가 낀 살금찻잔에 차 한 잔 마시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