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의 제갈량이 남만 정벌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노수라는 강에 이르자 풍랑이 심해서 건널 수 없었다. 현지 원로에게 묻자 49명의 머리를 바쳐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제갈량은 사람 머리 대신 밀가루를 반죽해서 사람 머리 모양으로 만들고 그 속에 양고기 소를 채워 강물에 던져 제사를 지내자 강물이 잔잔해져 군사들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이 고사에서 오늘날 우리가 먹는 ‘만두’의 어원은 ‘남만(蠻:오랑케 만)의 머리(頭)’에서 왔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진수의 역사책 ‘삼국지’에는 나오지 않
거제 유배의 역사는 1112년 7월 고려시대 왕위 계승권 다툼에서 밀린 왕족들이 거제도로 귀양 오면서 시작된다. 거제도 유배인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합쳐 500여명으로 추정되며 식솔과 노비 등을 포함하면 1000여명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거제에 유배 온 대표적 인물은 고려시대 정과정곡의 정서와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과 이행·최숙생·정황·김진규·김창집·이유원 등이 있다. 정과정곡은 동래에서 지었다는 설과 거제에서 지었다는 설이 있다. 거제출신 고전문학 전문가 고영화씨는 정과정곡이 거제에서 지어졌다고 주장했다. 정서는 고려 의종 5년(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패(百戰不敗)라 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이 말은 손자병법에 나온다. 상대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고 난 후 행하라는 말이다.20년 전쯤 가조도 동쪽 작은 섬 취도로 진격했다는 전갈이 왔다. 이유인즉 취도의 전승비가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장수인 도고 헤이하찌로 제독의 기념비라서 없애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긴급히 가조도 주민 대표에게 행위를 막으라고 말하고 단체 관계자와 설전을 벌였다. 도고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원동력은 이순신 장군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당시 러시아가 전쟁을 선포하자 수십
남부지방에서는 '계집아이'를 '가시내·가스나·가시나'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거의 전국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정확한 쓰임은 시집가기 전의 여자아이를 뜻한다. 일상적인 상황에서 '머스마=남자애/가스나=여자애' 정도의 의미로 보면 된다. 북쪽지방에서는 '간나'라 부른다. 이때 '종간나새끼'는 '종년의 새끼'라는 말로 심한 욕이 된다.물론 '가시나'라는 말은 친근한 상대일 때 주로 사용하고, 모르는 사람이나 존댓말을 해야 할 사람에게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 머스마에 새끼가 붙어 '머스마새끼'는 욕이 되듯이, 가시나도 '이 눔의 가시나가/야이
'님을 그리워하여 울고 있더니 접동새와 나와는 비슷합니다그려. 아니며 거짓인 줄을 지새는 새벽달과 새벽별만이 아실 겁니다. 죽은 혼이라도 임과 한자리에 가고 싶습니다. 아~ 어기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과시도 허물도 전혀 없습니다. 말짱한 말씀이었구나. 죽고만 싶은 것이여. 아~ 임께서 벌써 저를 잊으셨습니까. 맙소서 임이시어, 돌려 들으시어 사랑하소서.' - 정서 '정과정곡' 中에서고등학교 국어시간이면 배우는 정서의 '정과정곡' 제작 연대에 대해서는 여전히 견해가 엇갈린다. 한국민족문화대백
전라도 남원 땅 만복사는 대찰(大刹)이라 수백 명의 승려가 아침에 시주를 받으러 나갈 때와 저녁에 돌아올 때의 행렬이 장관이었다. 이런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이 남원 8경중의 하나였다. 조선 세조 때의 김시습(金時習)은 이 모습을 배경으로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라는 불교소설을 남겼다. 총각 양생(梁生)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만복사의 구석방에 살았다.
고려시대 중기부터는 나라의 이름 있는 인물들이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서 거제도에 내려와 살게 되었습니다.고려 의종임금 때 학자 정서는 의종이 왕이 되기 전에 의종의 아우를 왕으로 삼으려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썼습니다. 의종 5년(1151년) 고향인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의종 12년(1158년) 거제도로 유배되어 12년간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그때 의종은 머지않
메밀가루나 밀가루를 반죽해 소를 넣고 빚어서 굽거나 찐 음식이 만두다. 만두의 기원은 제갈량이 남만정벌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노수라는 강가에 도착했는데 너무나 풍랑이 심해서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강에는 황신 (荒神)이 살고 있어 풍랑을 일으키는데 그럴 땐 49명의 사람머리를 바치면 풍랑이 가라앉아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다고 했
농경사회에서는 일할 때와 쉴 때가 분명했다. 한식(寒食)부터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어 모내기를 하고 나면 여유가 생긴다. 이때 단오라는 명절을 두어 먹고 즐기면서 노동의 고단함을 잊게 된다.그런 후 한 여름을 농사에 시달리던 피로는 백중(伯仲) 때 씻어내고, 백중이 지나면 일년 중 가장 바쁜 가을걷이가 시작된다. 가을걷이 후에는 한가위(秋夕)가 일년 농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