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의 가치는 많은 사람이 문화재를 보고 느끼며 소중하게 보존하는데 의미가 있다.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내 세워져 있는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33호 아양리 삼층석탑(鵝陽里 三層石塔)의 경우도 거제시민의 눈에 쉽게 담을 수 없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지역 유산 중 하나다.1935년 아양리 탑골에서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 발견됐다고 전하는 이 석탑은 발굴 당시 일부를 찾지 못해 하탑신 대신 자연석을 올려 형태를 만들었고 상륜부도 보수해 현재의 형태를 갖췄다.기단도 몇 개만 남아 있었고 기단과 땅을 덮은 돌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거제의 5월은 고슬고슬한 하얀 쌀밥이 달린 듯한 덕포 이팝나무가 익어가는 계절이다.지난 1990년 1월 16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95호에 지정된 덕포이팝나무의 정식 명칭은 '거제 덕포동 이팝나무(巨濟 德浦洞 이팝나무)'다. 거제지역은 동백나무와 벚나무·후박나무 다음으로 이팝나무가 가로수로 많이 심어졌는데 현재 거제지역에는 4000그루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거제시민에게도 익숙한 나무다.300살을 훌쩍 넘긴 덕포이팝나무는 높이 15m·둘레는 3m, 수관 폭은 동서 16m·남북 1
지난 2019년 3월 거제시는 그동안 문헌 등 기록에 없는 조선시대 전기 봉수대를 사등면 백암산에서 발견했다고 밝혔다.주민의 제보로 조사된 이 봉수대는 '백암산 봉수대'로 조선 세종때 최초로 연변봉수대의 축조법을 정한 '연대조축규식(烟臺造築規式)'에 따라 만들어졌다.전문가들은 백암산 봉수대가 지금까지 거제지역에서 발견된 봉수대 유적 중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한 봉수대로 조선 전기 거제지역이 왜구(삼별초 등)를 피해 거창의 가조현(加祚縣)으로 피난 갔다가 조선 세종 4년(1422) 거제지역으로 돌아와 사등성
거제시 둔덕면에서 지방도 1018선을 따라 거제면으로 가다 법동낚시공원으로 가기 전 모퉁이에는 '하미정(荷湄亭)'이라는 조그만 건물이 하나 있다.정자(亭子)의 이름이 '하미정(荷湄亭)'이라 불린 것은 양하미(揚荷湄), 즉 '물가에 연꽃이 날린다'란 뜻이다. 현재 하미정은 1948년에 무너져가는 정자를 임시로 고쳐 만들었다.정자 안에는 여러 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김씨·허씨·이씨·권씨·윤씨·조씨·구씨 등 거제지역
● 서불그네(사자바위)= 해금강 마을 주민들은 우제봉을 '서가람산(徐伽籃山)'이라 불렀다. '가람(伽藍)'은 승려가 불도를 닦는 숲 등의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불로초를 구하러 온 서불이 해금강의 절경에 반해 은둔한 곳이란 전설이 있다. 이 바위는 갈곶마을 방향에서 보면 생김새가 사자와 닮았다고 해 사자바위라 불리기도 해 '일월관암' 또는 '그네바위'로 부른다.일월관암은 일출과 월출이 진행될 때 사자바위가 해와 달을 쓰고 있는 듯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그네바위는 서불이 진시황으
● 십자동굴= 해금강에서 가장 유명한 십자 동굴은 동서길이 180m·암벽 높이 123m의 협곡을 따라 열 십(十)자 모양의 동굴이다. 십자굴 내부는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웅장하고 풍월과 고시를 읊는 옛 선현들의 음성이 들리는 듯 착각이 들 정도로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곳으로 예부터 마을 사람들 사이에선 십자동굴이 남해 바다의 용궁이었다는 전설이 있었으며, 실제 십자동굴 안에는 남해 용왕의 옥좌바위가 있다.● 부엌굴(얼음굴)= 80m 정도 길이의 부엌굴은 소형선박만 출입이 가능한 협소한 곳이다. 예부터 부엌굴 내부
최근 거제를 대표하는 관광지를 떠올리면 바람의언덕·포로수용소·외도 정도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만년 세월 파도와 비바람이 만든 만물상으로 오랫동안 거제관광의 1번지였던 곳이 있다.지형이 칡뿌리가 뻗어내린 형상이라 붙여진 갈도(갈곶도)라는 이름보다는 '바다의 금강산'을 뜻하는 해금강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관광객을 맞아온 남부면 갈곶리 산1번지 명승제2호(1971년 지정) 해금강이다.해금강은 섬 하나가 전설덩어리다. 환상적인 일출·월출·낙조를 자랑하는 사자바위를 비롯해
거제지역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즈음으로 보고 있다.지역에 남아 있는 천년 고찰은 이미 폐사되고 없지만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 양식의 불교 유적은 대우조선해양 내 아양리 3층 석탑(경남도 문화재자료 제33호)과 사등면 오량리 산73-1 신광사(神光寺) 인조 석굴에 있는 석조여래좌상(경남 유형문화재 제48호) 등이 있다.또 계룡산 남쪽 원효암과 정상에 있는 의상대, 둔덕면 산방산의 귀절암과 설매암, 일운면 북병산 인근 삼거리에 있었다는 고려 초기 은적암, 하청면 유계리 앵산 중턱에 있었던 북사 등의 흔적이 남아 거제지
경남 거제시 남부면 명사마을에서 저구마을로 가는 옛길에는 쌍효문(雙孝門)이 있다.쌍효문은 한 명이 아닌 두 명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시대 나라에서 지정해 세운 정려(旌閭:충신·효자·열녀 등을 그 지역에 정문을 세워 표창)로 전통문화의 얼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쌍효비 이야기는 1905년 5월 남부면(당시 동부면) 명사마을 앞바다에 해적(왜구) 무리가 배 7척을 이끌고 침입하면서 시작된다.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박하는 등 노략질을 일삼던 해적을 막기 위해 당시 마을 촌장이었던 양재현(梁
경남 거제시와 부산의 동래지역은 삼한시대 독로국이 위치했다며 거제독로국설과 동래독로국설을 주장하고 있다.부산의 동래지역이 거제독로국설을 부인하는 이유중 하나는 거제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중에는 나라의 수장급이 사용했을 만한 유물출토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거제지역 입장에선 동래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은 독로국의 시기와 맞지 않아 근거가 약할뿐 아니라 변진 독로국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유물이 없는데다 어문학적, 역사기록적으로 거제독로설에 비해 근거가 약하다고 보고 있다.이와 관련해 지난 1996년 ㈜대우조선 노동조합에서 노동자 복지회관을 건립
거제시지와 사등면지에 따르면 오량석조여래좌상은 1930년경 오량리 절골마을에 있던 현 신광사 아래쪽 논에서 괭이질 하던 농부에 의해 발견됐다.발견 당시 불상은 목이 부러져 있고 귀와 코·손가락 부분은 훼손됐으며 불상의 하연좌대와 상연좌대만 발견되고 상·하 연좌대를 잇는 8각 좌대는 발견되지 않았다.석불이 발견된지 20여년이 지난 1950년께 통영 출신 송모씨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석불을 안치할 법당과 불단을 건립하고 절 이름을 '석불암'이라 지었다. 이 과정엔 마을 주민들로부터 전해오는 유명한
거제지역엔 거제를 대표 할만한 유서 깊은 전통사찰이나 불교 관련 문화제가 드문 편이다.하지만 사등면 오량리 산73-1 신광사(神光寺) 내 인조 석굴에는 높이 92㎝에 8조각의 연꽃 봉오리 좌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거제의 석굴암 오량석조여래좌상(경남유형문화재 제48호)이 있다.옷차림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의 형식을 취하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손바닥을 펼쳐 무릎 위에 올려놓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왼팔은 신체와 붙어 있지만 오른팔은 가슴 옆구리와 떨어져 있다.불상의 대좌(臺
상사리(裳四里) 명문 기와는 1996년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 일대에서 경지정리 사업 차 시행한 거제고군현치소 발굴 현장과 지난 2007년 둔덕기성 집수지 발굴조사 현장에서 각각 1기씩, 2기가 발견됐다.상사리 기와 편은 상사리 사람들이 기와를 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기와의 제작과정과 운반거리를 감안하면 장거리 이동이 어려워 상사리가 거림 인근에 위치한 마을이며 상군 관할의 여러 마을 중 하나로 '상군의 치소지가 거림'으로 추정할 수 있다.현재 김해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 명문 기와는 통일신라시대 상군과 고려시대 거제
국가 사적 승격을 추진하고 있는 거제옥산성(경상남도기념물 제10호)은 지난 2015년부터 이뤄진 시굴조사에서 통일신라대 유물 등 다량 출토됐다.최근 정밀발굴에서는 삼국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에 걸쳐 성벽이 보수된 사실이 밝혀졌다.옥산성 발굴조사과정에서 그동안 거제지역은 물론 다른 지역에서 조차 보기 드문 유물 2점이 발굴돼 세간의 이목을 끌었는데 지난 2015년 정비사업 과정에서 발견된 잡상이다.잡상은 조선시대 널리 사용된 장식 기와의 하나로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을 흙으로 구워
지난 1984년 3월8일 고현만 매립 준설작업을 진행하던 김종태(당시 고현 거주)씨는 모래더미에서 쇳덩이를 발견한다. 이 쇳덩이는 발견 직후 곧바로 해군사관학교로 옮겨졌고 2년 뒤인 1986년 11월29일 보물 제885에 지정된다.현자총통의 약실에는 '1596년 7월에 수군 감영의 작업소에서 제작하니, 현자총통의 무게는 89근으로 서울의 장인 이춘회가 만들었다(萬曆丙申七月日水營功會 玄字重八十九斤 京匠人 李春回)'고 써있다. 명문의 기록으로 보면 이 총통은 1596년은 12월에 일어난 정유재란 직전 제작돼 사용된 총통으
예로부터 장승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마을어귀에 세워져 주민들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아왔다. 거제지역 곳곳에도 장승포·장승들·장승고개·장승골(벅시골) 등 관련 지명이 남아있지만 전통을 지켜오는 마을을 찾기란 쉽지 않다.벅수는 할아버지·할머니·당산·하루방·천하대장군·수살·돌미륵·신장 등의 여러 의미와 이름을 갖고 있다.1985년 광주박물관에서 발간한 '벅수 信仰 現地調査(신앙 현지조사)'에는 거
농업을 주업으로 생활할 때는 논과 밭에 계절따라 곡식을 심어서 그 곡식이 익으면 수확을 한다. 곡식을 심어서 기르는 과정도 어렵지만, 중요한 건 마지막 수확을 할 때다.이럴 때 날씨가 좋지 않고, 비가 내리면 수확한 곡식을 저장하거나 간수 할 곳이 없어서 밤낮으로 마루바닥에서 수확을 하기도 했다. 방에 불을 지피고 방바닥을 따뜻하게 해 수확을 하기도 한다.이때 제일 힘드는 것이 도리깨질이다. 도리깨는 긴 대나무 끝에 대나무나 긴 나뭇가지를 엮어서 매질을 만들어 타작을 한다.이 사진은 밭에 콩을 심어서 가을에 수확하는 장면이다. 논바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에서 동쪽 눈티고개를 넘어서면 멀리 해금강과 내도·외도가 눈 앞에 보인다. 눈티고개 아래 해안은 윤기가 나는 모래사장이 있다. 이곳이 와현해수욕장이다.와현이란 지명은 지세포에서 와현으로 넘어오는 고개의 산이 양쪽에서 내려오다가 서로 팔을 베고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이곳의 이름을 따서 누우래·누운티·누울티로 불리다가 한문으로 마을 이름을 고치면서 누울와(臥) 산마루현( 峴)자를 따 와현이라 했다. 이 마을은 1769년에 왜구미 방에 속해 있다가 1889년에 왜구(倭仇)마을, 미조(彌助)마을, 와현(臥峴)마을로
거제시 장평동은 고현항 주변에 길고 넓은 들판이 있는 마을이다. 긴 장(長) 넓은 땅 평(坪)자를 써 장평이라 했다.농경문화가 발달한 때는 민속행사로 정월대보름과 추석 전후로 널뛰기 놀이를 한다. 널뛰기는 부인들의 놀이문화로 신체 건강과 정신 건강에 많은 도움을 준다.1973년 옥포에 대한조선공사가 옥포조선소를 만들게 됐다. 1974년 이학수가 죽도 섬 이름을 따서 장평에 삼성조선소의 첫 작업인 죽도조선소 공사를 시작했다.조선소가 들어 설 자리는 대대로 농어업을 하면서 평화롭게 살아온 장평·와치·연곡 마을
고령화 사회를 맞아 노년기 삶의질 향상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노인들이 가진 각자의 개성과 취미, 특기의 다양성을 발휘하며 공동체 일원으로 만족감과 유대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사회적 책무이기도 하다.이 사진은 1982년 8월20일 일운 노인복지관 준공식 장면이다. 이봉목 군수가 이 사업을 시작해 준공을 앞두고 사직했다.한 달 뒤에 정태영 군수가 부임해 준공식을 하고 있다. 이때의 일운면 지세포는 농어업을 위주로 집단 마을을 이루며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생활수준도 높았다. 장수 노인도 많았다.복지관 준공식장은 거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