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국채보상운동' 정신…세계의 기억이 되다
대구 '국채보상운동' 정신…세계의 기억이 되다
  • 거제신문
  • 승인 2019.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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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거제포로수용소, 유네스코 등재와 관광자원화③-2]지역의 가치가 세계의 가치로 일어서다 - 대구
등록기록물 中 사진은 1장뿐 2474건이 지류(紙類) 기록물
■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시민 책임의식 넘어 기업 사회적 책임 중요성 시민운동도 진행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동아시아 근대화의 형성과정에서 발현된 국민적 책임의식, 평화 사상의 전개 과정을 담고 있는 기록물로서, 중요한 세계적 의미를 갖고 있는 역사적 사료이다.

일반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는 침략의 수단으로 약소국에 차관을 제공해 식민지화를 추진했지만, 우리나라의 국채보상운동은 독창적인 방식으로 전 국민이 외채를 갚기 위해 비교적 장기간 전개한 유례를 세계적으로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중국·멕시코 등 피침략국 국민의 일부가 외채 갚기 운동을 전개한 경우가 있었지만 이들은 짧은 기간, 일부의 사람들로 이뤄졌다는 차별점이 있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에는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하기 위해서는 지배·서민계층과 같이 계층의 구분이 없음을 강조하는 국민적 책임의식이 빛나고 있다. 이 정신은 지금도 살아있어 21세기의 사회 책임운동으로 그 맥을 잇고 있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상임대표 신동학)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 중 하나로 대구의 시민운동 중심에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국채보상운동을 국내·외로 알리는데 그치지 않고, 1907년 시민 중심의 정신을 미래의 인재들이 계승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의 시민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1999년 조성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국채보상운동의 시민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1999년 조성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100년 전 국채보상운동은 현대판 '금 모으기' 운동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국가가 진 빚을 국민이 갚기 위해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백정·영세상인·나무꾼·걸인·도적 등 최하계층도 참여할뿐 아니라 어린아이들도 세뱃돈을 기부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 속에는 당시 시대상의 각종 눈물겨운 이야기가 담겨 있어 보다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남성은 술과 담배를 끊고, 여성은 반지와 비녀를 내놓았다. 기생과 걸인, 심지어 도적까지도 의연금을 내는 등 전 국민의 약 25%가 이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사람들은 전 국민적 기부운동을 통해 국가가 진 외채를 갚음으로써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 했다.

한국의 국채보상운동은 영국 언론인이 한국에서 발행하는 영어신문에 의해 서방세계로 알려지게 됐다. 해외 유학생과 이민자들이 외국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통해서도 해외로 알려지게 됐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우리나라의 국채보상운동을 알림으로써 전 세계에 알려지게 돼, 외채로 시달리는 다른 피식민지국에 큰 자극이 됐다.

2011년 10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위해 세워진 국채보상운동기념관과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표.
2011년 10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위해 세워진 국채보상운동기념관과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의 세계유산적 가치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에는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하려는데는 지배계층이나 서민계층 같은 계층의 구분이 없음을 강조하는 국민적 책임의식이 빛나고 있다. 이 정신은 지금도 사회책임운동으로 그 맥을 잇고 있다. 이 국민적 책임정신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금모으기 운동으로 재현됐고, 이 운동은 제2 국채보상운동으로 불렸다.

이처럼 한국에서 발생한 외채 갚기 운동은 국민의 권리보다는 국민된 도리 또는 책임을 강조하면서 전개됐다. 채무자의 책임과 함께 채권자의 책임 또한 예리하게 지적했다. 국채보상운동은 사회적 책임투자, 사회적 책임소비 등 경제주체의 사회적 책임운동으로 맥을 잇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채권자의 책임을 주장하고 있는 토빈세 등 투기자본규제 운동 및 부채탕감운동인 쥬빌리 2000운동, 개발도상국의 금융기술능력 지언을 선포한 2015년 유럽연합의 지속가능개발목표 캠페인과 같은 새로운 경제사회질서운동과도 그 맥을 잇는다.

국채보상운동 정신은 시민적 연대를 통해 채무자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국난을 극복하는 인류 보편의 정신이며, 지금도 살아있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국가적 위기에 자발적으로 대응하는 시민적 '책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물이다. 또 제국주의의 금융침략에 대해 온 국민이 외채를 자발적으로 떠맡아 해결하려는 평화적 공존을 지향한 운동이기도 한다.

금연·절약·나눔의 평화적 방식의 비폭력운동을 통해 국가 간 호혜적·평화적 공존을 달성하고자 했다. 불매운동을 통한 소극적 의미의 비폭력을 넘어, 기부를 통한 성금으로 외채 그 자체를 갚아 침략을 극복하고 동아시아에서의 상호 호혜적 공존을 추구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이후에 일어난 운동과 비교해 시기적으로 가장 앞섰고, 가장 긴 기간 동안 전 국민이 참여하는 국민적 기부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이다. 당시의 기록물이 유일하게 온전히 보존돼 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가치가 크다.

국채보상운동의 취지를 알리는 국채보상상채회 취지서(사진 왼쪽)와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명단이 적힌 성책.
국채보상운동의 취지를 알리는 국채보상상채회 취지서(사진 왼쪽)와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명단이 적힌 성책.

'기록의 중요성' 세계기록으로 증명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2002년 5월7일 조직돼 꾸준하게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자료를 발굴·보존·정리 작업을 하고 학술대회도 개최하면서 그 기반을 다져왔다.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중 가장 시기가 빠른 것은 1907년 2월21일 대한매일신보 기사 '국채 1300만원 보상취지'다.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형태는 전체 2475건 가운데 1건을 제외한 모든 기록물이 지류이다. 기록물의 형태는 낱장·가철·성책·절첩 등 다양한 형태를 띄고 있다.

취지서·발기문·편지글은 낱장의 형태, 성금의 액수와 이름을 적은 경우는 성책의 형태로 이뤄진 경우가 다수다. 그 내용은 편지글·신문기사·공문·영수증·취지서 등으로 구성이 다양하다. 문서작성 주체와 작성년도를 파악할 수 있는 경우가 다수로 국채보상운동의 시간적 흐름을 파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기록물의 크기는 10㎝ 정도의 영수증 같은 작은 크기부터 100㎝가 넘게 길게 작성된 것도 존재한다. 기록물의 언어는 대부분이 국한문 혼용으로 돼있지만, 일부 문서는 순수 한문으로 돼 있고, 순수 한글문서는 남아 있지 않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는 "각 지역에 산재한 국채보상운동 자료를 발굴·수집·정리해 역사문화자원으로 지속적으로 보존관리·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며 "기록물을 통해 인류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많은 사람들의 삶과 생활·정신세계에 영향을 주는 기록물을 미래의 인류가 기억하게 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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