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거제포로수용소, 유네스코 등재와 관광자원화①]
6.25 전쟁이 거제에 남긴 포로 역사
시, 2016년부터 17개국 43개 기관과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위해 노력

거제포로수용소는 6.25 전쟁에 의한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1951년 2월부터 고현·수월지구를 중심으로 설치됐다. 1951년 6월 말까지 인민군 포로 15만명, 중국군 포로 2만명 등 최대 17만3000여명의 포로를 수용했다. 이곳에서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간에 유혈살상이 자주 발생했고 냉전시대 이념 갈등의 축소현장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곳은 1983년 12월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9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거제포로수용소는 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다크투어리즘'이 가능한 전국에서 손꼽히는 장소이다.
역사적 가치가 높음에 따라 현재 거제시는 포로수용소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준비를 진행 중에 있다. 포로수용소의 위상제고와 문화자원의 발전 방향을 제시한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국내외 역사학자는 "포로수용소 아카이브 센터 건립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 거제포로수용소와 관련된 기록물 3만7232장은 미국·유엔기록보존관리부 등 전세계에 분포돼 있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기록물 수집 현황을 찾고 거제포로수용소와의 연계성을 찾아 기록물을 분리하는 데에 열중하고 있다. 거제포로수용소의 기록물로 확인되면 세계 곳곳에 분포돼 있는 기록물이 함께 세계기록유산 등재로 추진할 예정이다. 그러나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해서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제 이전에 등재해온 대구의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1980년 인권기록유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 등 이들 모두 기록유산이 되기까지 범시민운동이 펼쳐졌고 전국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이를 위해 거제신문은 시민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거제포로수용소의 역사적 배경과 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돼야 하는지 당위성에 대해 보도하고 범시민운동 캠페인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할 예정이다. 거제 이전에 기록유산 등재를 해온 비슷한 주제의 기록을 가진 지자체와 선진 사례를 방문해 어떠한 시민운동과 정책이 펼쳐졌는지 알아볼 계획이다. 또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후 사후관리를 통해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하고 있는 지자체와 세계 선진 사례를 찾아가 거제에서 현재 추진하고 있는 사항에서 부족한 점과 배울 점을 알아본다.  - 편집자 주


유엔군 관할 포로수용소 위치로 'POW1'이 거제도 포로수용소다
유엔군 관할 포로수용소 위치로 'POW1'이 거제도 포로수용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한때 연합군에 속한 강대국들은 전후 세계 냉전의 소용돌이에서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를 앞세워 대립하기 시작했다. 세계 냉전은 신생 독립국가 건설을 준비하던 한반도에 또 다른 '무력전쟁'을 강요했다. 6.25 전쟁은 한국과 북한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안겨줬다.

6.25 전쟁은 '두 개의 전쟁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1950년 6월부터 1951년 여름까지가 영토전쟁이라면, 1951년 후반부터 1953년 7월까지는 포로를 둘러싼 전쟁이었다. 전쟁을 빨리 종결시키지 못하고 2년 가까이 지연된 이유도 바로 '전쟁 포로'를 둘러싼 여러 쟁점 때문이었다.

1949년 발효된 전쟁포로의 대우에 대한 '제네바 제3협약'이 처음으로 적용된 전쟁이다. 포로의 성격에 따른 분류와 재분류, 심문과 재심문, 강요된 선택과 교육이 이뤄졌고, 수용소 내에서는 잇따라 참혹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정전 협정 체결 후 마침내 포로들은 '자원 송환' 원칙에 따라 돌아간 송환자, 돌아가기를 거부한 미송환자와 중립국을 선택한 자로 나눠졌지만, 이미 많은 포로들은 극단적인 이념 대결, 폭력과 차별 속에 고통 받은 뒤였다. 생존이 불확실한 전쟁터에서 삶의 희망을 갈구했던 전쟁 포로. 마지막 남은 냉전의 땅, 한반도다.

누가 포로가 됐나

6.25 전쟁 전 시기를 통틀어 유엔군 관할에만 약 18만 여명과 북한 및 중국군 관할에 최소 10만여 명 이상의 전쟁포로들이 있었다. 포로들은 붙잡힌 뒤 이송과 이동과정에서, 수용소에서 상당수가 병사하거나 죽임을 당했다.

3년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많은 포로가 발생했다. 전쟁 포로의 대부분은 정규 군인이었다. 북한군, 중국군들은 정규 군인으로서 전투에서 패배하면 포로가 됐다. 무기를 버리고 손을 든 병사의 모습은 전쟁포로의 이미지를 상상할 때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모습이다. 이들 중에는 나이 어린 소년병부터 늙은 병사들도 있었고, 북한 출신 병사들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징집된 소위 '의용군'도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6.25 전쟁에서 포로가 된 사람들은 군인만이 아니었다. 전쟁 이전부터 있었던 빨치산들은 국제법상 전투원이 아니었음에도 붙잡히면 포로로 분류돼 수용소로 보내졌다. 참전과 포로 과정의 여러 이유를 불문하고 수용소에 갇힌 모든 사람들은 전쟁 포로로 취급됐다.

1952년 4월부터 7월 말까지 거제 포로수용소 경비를 담당한 주한네덜란드 파견대 모습
1952년 4월부터 7월 말까지 거제 포로수용소 경비를 담당한 주한네덜란드 파견대 모습

포로들은 어디로 갔는가

전쟁터에서 붙잡힌 포로들은 근처에 설치된 집결 수용소라는 임시 수용시설로 보내졌다. 집결수용소는 간단한 철조망으로 이뤄진 시설이었다. 이어서 포로들은 임시수용소에 모아졌다.

임시 포로수용소는 포로들에게 어떠한 편의도 제공하지 않는 열악한 장소였다. 포로들은 이곳에서 잠시 대기한 뒤 수송선을 통해 거제와 같이 정식수용소가 건설된 곳으로 보내졌다.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됨에 따라 포로의 숫자는 급격히 늘어났고 부산은 많은 포로를 수용하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다. 때문에 안전한 후방에 있으면서도 식수의 공급이 용이하고 포로의 수송 또한 쉬운 장소로 거제도가 새로운 포로수용소 후보지로 선정됐다.

거제포로수용소는 1951년 1월부터 건설돼 2월부터 운영을 시작했고, 1951년 말까지 17만명에 이르는 포로들을 수용하게 됐다. 거제도는 전시 법에 의거해 주민들을 분산시키고 부지를 징발해 수용소를 건설했다.

포로들은 어떻게 관리됐는가

언어장벽과 관리인원의 부족으로 포로들의 기초정보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초기 단계부터 심문, 지문채취, 사진 촬영을 통해 포로 관리에 필요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 했지만, 포로를 송환할 때까지도 완전한 판단은 이뤄지지 않았다. 포로들은 여러 차례의 심문과 함께 이발, 신체검사 등의 과정을 거쳐 각 수용동에 배치됐다.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일과는 오전 5시30분에 기상과 동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6시30분에 전원 집합해 인원점검을 받았다. 오전 7시에는 오전 일과를 시작했고, 오전 11시30분에 점심 식사를 했다. 오후 1시에는 작업 인원이 집합해 점호를 받고, 오후 4시에 일과를 끝마친 뒤 오후 5시에는 저녁 식사를 했다.

일과 시간에 이들은 포로수용소 시설 건설과 같은 노역에 동원되거나, 미군의 민간정보교육국이 실시하는 포로 재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저녁식사 이후 오후 8시 소대별로 점호를 하고, 잠들기 전까지는 자유 시간으로 운동·독서·목욕·세탁 등을 했다.

북한군 소년병 포로 모습으로 미 해병 제1사단 5연대에게 포로가 된 북한군 소년병들. 이들은 웃옷을 벗고 무장해제를 당한 뒤 항복했다
북한군 소년병 포로 모습으로 미 해병 제1사단 5연대에게 포로가 된 북한군 소년병들. 이들은 웃옷을 벗고 무장해제를 당한 뒤 항복했다

포로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

미군은 포로 재교육을 위해 미 육군 심리전본부 산하에 민간정보교육국을 설치하고, 1951년 6월부터 반공주의 교육을 실시했다. 미군은 이를 '배신자 프로그램'이라고 불렀는데 교육의 목적은 본국으로 송환될 포로들을 미국식 자유주의 질서의 전파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수업은 30주 일정으로 진행됐으며, 수업의 내용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 6.25 전쟁의 발발 원인, 유엔의 목적과 기능, 전체주의와 비교를 통한 민주주의의 원리와 이상, 자유세계의 발전상, 한국과 중국의 정치·사회·경제 문제 등이었다. 모든 포로들은 이 수업에 참여해야 했다.

이밖에도 라디오 프로그램과 녹음 방송이 하루 세 번 이뤄졌고, 검열된 책·신문들도 포로에게 제공됐다. 문맹자에 대한 교육도 이뤄졌고, 직업 훈련도 제공됐다. 이러한 재교육 프로그램의 주요 목적은 포로들에게 진보적이며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 사회를 지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용소 내 공산주의 포로들의 조직적이고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포로들 사이의 폭력을 심화 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재교육 프로그램은 포로들의 저항으로 1952년 5월에 완전히 중단됐다.

북한 및 중국군 관할 수용소는 국군 및 유엔들에게 전쟁의 당위성이나 자본주의 폐해뿐만 아니라 다양한 심리전 교육을 실시했다.

포로 곁에 누가 있었나

포로수용소에는 포로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포로들 외에도 감시를 위한 경비병들이 가장 많았고, 심문과 의사소통 등을 위한 통역 요원, 수용소 사령부에 근무한 지역민과 피난민으로 구성되는 민간요원·의사·간호사, 포로나 근무자들을 위한 신부·목사 등도 있었다. 그리고 흥남철수로 거제도에 온 피난민도 포로 곁에 있었다.

수용소 주변 민간인들은 경비병들과 다양한 형태로 접촉했다. 물품을 교환하거나 빨래를 해주거나 정보를 교환하거나 하는 등의 행위가 이뤄졌다. 이처럼 포로수용소는 그 자체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살아가던 작은 세상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수용소'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국가'였다. 가장 치열한 물리적·이념적 전투가 진행되는 또 하나의 전장이기도 했다.

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유엔군 관할 수용소 내 포로의 구성도 다양했다. 북한군·중국군·남한측 민간인 억류자 등…. 그런데 이들 포로들은 송환과 미송환이라는 이분법적 선택지를 강요받았다.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이념적 지향을 지닌 포로들 사이에 극심한 폭력적 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북한 내 포로수용소 국군 포로들은 자체적인 반공 조직을 결성했으며, 유엔군 포로들은 심문 회피와 탈출 등을 계획했지만 밀고자에 의해 성공할 수 없었다.

1953년 4월부터 6.25 전쟁의 포로들은 다양한 곳으로 송환되기 시작했다. 거제도 등 여러 수용소에 분산 배치된 포로들의 최종 목적지는 모두 다섯 곳이었다. 중국군 포로는 중국 혹은 대만으로, 북한군 포로는 한국이나 북한 또는 중립국으로 갔다. 1953년 9월 기준에서 북한 포로수용소의 국군 및 유엔군 포로들은 일부만 자국으로 귀환하거나 중립국을 선택했다.

결국, 포로들은 어디로 갔는가

포로들은 자신이 송환될 곳의 국기들을 스스로 만들었으며, 이 국기들을 앞세우고 송환됐다. 제3국을 선택해 떠난 포로들은, 군복 차림의 다른 포로들과는 달리 매우 세련된 복장을 하고 있어 외관상 매우 두드러진다. 그러나 어디를 선택했던지 그 이후 포로들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6.25 전쟁기 포로수용소 기록물은 제네바 제3협약의 첫 적용사례이며 아픈 역사를 평화유산으로 전환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거제시는 2016년부터 포로수용소 관련 기록물을 지속적으로 수집하고 있으며, 기록물을 소장하고 있는 17개국 43개 기관과 세계기록유산으로 공동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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