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5년 특별기획-거제의 잃어버린 섬들을 찾아서⑦

거제의 수많은 섬들 중 일부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군사요충지 역할로 인해 군(軍)으로 소유권이 이전된 이후 반환되지 않고 있다. 또 통영군과 거제군이 합병된 이후 다시 복군됐지만 이전 거제군 소유의 유·무인도 상당수가 통영에 귀속돼버렸다.
이전에는 '거제'라는 정체성으로 살던 주민들이 하나 둘 세월 앞에 스러져간 이후 후배 세대들은 '통영'을 정체의 기본으로 살고 있다. 또 행정구역상 거제시에 있지만 거제시민들의 발길을 허용치 않는 섬들 또한 몇몇 있다. 외도가 민간에 의해 개발돼 관광지로 각광받은 이후 장사도 관광지 개발 등 섬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고 새로운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이에 거제신문은 창간25년을 맞아 특별기획으로 거제와 관련 있는 주요 섬들을 방문해 거제의 흔적을 살펴보고 행정구역을 넘어 새로운 문화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로 했다. <편집자주>

거제사람 옥미조와 섬처녀의 순정을 간직한 섬…그리고 희미해지는 옛 추억의 흔적들

거제시민들이 장사도와 매물도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장사도의 경우 '장사도해상공원'이 생기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매물도도 크게 알려진 것은 TV에 방송이 나간 직후부터이며 이전에는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곳에 불과했다.

하지만 두 섬과 관련 거제시 남부면 일대 주민들이라면 한동네 친구처럼 다정하게 다가온다. 예전부터 이 섬들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행정관서가 있는 통영보다 가까이 있는 남부면 일대를 자주 방문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섬들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남부면 저구마을을 제집 드나들 듯 하며 지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은 공원개발로 주민들이 모두 떠나고 없거나 서로 왕래가 줄어 이전보다 친밀감은 떨어지는 편이다.

그러나 거제와 더 가까운 섬 장사도와 매물도는 원래부터 통영보다 거제와 더 가까웠다는 사실을 이번 취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진뱀이섬을 일깨운 것은 거제사람

사실 이번 취재가 없었더라면 장사도에 대한 진면목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단지 장사도해상공원을 개발한 모 씨가 지인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외도와 비슷한 해상공원이라는, 그 정도 선까지만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 섬에 대해 확인하는 과정에서 행정구역상 통영보다 거제에 있어야 마땅한 섬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됐다.

남부면 저구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확인한 결과 이 섬은 해상공원으로 인해 주민들이 모두 떠나고 없었지만 주민들이 거주할 당시 잦은 왕래가 있었다는 것이다.

주민등록등본을 떼거나 하는 행정상의 작은 일은 통영시나 면사무소가 있는 한산도가 아니라 남부면사무소를 통했다고 한다.

특히 명절 때는 저구마을 학생들이 장사도를 찾아가 그곳 분교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며 우정을 확인하기도 했다고 한다. 거제의 다른 지역 사람들이 장사도를 인식조차 못하던 시절부터 남부면 저구마을 주민들은 이미 친구로서 그들과 통교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만큼 거제에서 가까웠다는 방증이다.

이러한 약간의 사전지식을 갖고 찾은 장사도는 말 그대로 해상공원이었다. 저구마을에서 유람선을 타고 도착한 장사도에서 허락된 시간은 두 시간 남짓. 그 시간동안 섬의 곳곳을 누비며 거제의 흔적을 찾았다.

무더운 날씨에 가파른 언덕은 부담스러웠지만 먼저 관심을 가진 곳은 '장사도분교'였다. 옛 모습을 보존한다고 했지만 운동장은 분재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교실도 예전의 모습이 아니라 현대화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반가운 것은 하나쯤 발견할 수 있는 법. 풍금이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음악시간에 어떤 악기를 쓰는지 모르겠지만 1970~1980년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사람들에게 풍금은 악기의 으뜸이었다.

약간은 아쉽지만 그래도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풍금이 있는 장사도분교는 저구마을 주민에게서 들었던 것처럼 축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어른이 돼버린 눈으로 바라봤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으로 섬마을 전통가옥인 너와집이 있는 '섬아기집'으로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급하게 이동하는 중에도 주변의 경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지만 그곳에서도 별무소득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 마치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거제의 흔적에 대한 기대를 모두 접고 돌아갈 배를 타기 위해 기다려야 할 시간 동안 주변 경치나 감상하자며 찾은 카페테리아 근처에서 작은 교회를 발견했다. '사람이라곤 오직 종업원 밖에 없는 곳에 교회라니'라는 호기심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결국 그 호기심이 찾은 것은 거제의 흔적이었다.

▲장사도에 세워진 옥미조 선생 공덕비.
옥미조 선생 공덕비

거제 연초면 출신의 동화작가인 옥미조 선생이 지난 1972년 장사도분교의 교사로 부임해 섬을 변모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한 공덕비였다. 교회도 옥 선생의 작품이었다. 74년 섬을 떠나기까지 2년여의 짧은 시간동안 정기선조차 없던 낙도를 확연히 변화시킨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었다.

필자는 1982년 옥미조 선생이 발간한 '운동장을 돌아다니는 바람글자'라는 동화집을 당시에 구입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거제 출신의 동화작가였기 때문에 더욱 선명히 기억에 남았던 이름이다.

그 이름을 여기 장사도에서 만난 것이다. 그리고 이 섬에서 쓴 '진뱀이섬의 신화'라는 수기는 당시 새마을운동 관련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유현목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져 소개되기도 했다고 한다. 가난한 마을에 교사로 부임해 삶의 희망을 일깨운 이가 거제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의 일처럼 그렇게 섬을 위해 노력했던 이면에는 진뱀이섬 장사도를 거제의 섬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섬마을 처녀의 순정이 있었던 매물도

통영시 한산면 매죽리. 매물도와 소매물도는 장사도와 마찬가지로 남부면에서 더 가까운 섬이다. 저구마을에서 도선을 타고 30여 분을 달리면 만날 수 있다. 통영에서는 한시간 가까이 걸릴 정도로 먼 곳이다.

이 섬들 역시 통영보다 거제와 가까운 섬이다. 장사도 주민들처럼 저구마을이 가장 가까운 번화가였다. 저구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지금은 아름다운 주변풍경들로 인해 펜션이 들어서고 숙박업을 주로 하지만 이전에는 낚싯배를 근거로 해서 살아가는 주민들이 많았다고 했다. 낚시꾼들이 저구마을에 주차를 하고 배를 대여하기 때문에 섬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고 했다.

하지만 저구마을 낚싯배와 매물도 낚싯배 사이에 경쟁이 붙어 매물도 낚싯배를 이용하는 낚시꾼은 주차장 사용을 금지시키면서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이다.

예전보다 왕래가 줄어든 매물도로 향하면서 거제 주변의 풍경이 이렇게 아름다웠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서불이 거제에 불로초가 있을 것으로 착각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매물도 주민들에게서 거제에 대한 특별한 친근감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통영사람이라는 자의식이 더 강해 보였다. 하지만 일부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은 저구마을과의 기억을 이야기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 전 일이고 최근에는 찾을 일이 거의 없다는 반응이었다.

서양식으로 치장한 고급펜션들이 줄줄이 들어선 동네는 이미 거제의 기억을 많이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주변의 풍경들이 아닐까. 기암절벽과 주변의 섬들이 연출하는 아름다운 풍경들.

돌아오는 배에서 어떤 한 사람이 문득 떠올랐다. 어머니가 매물도 출신이라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와의 사랑이 그곳에서 이뤄졌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고향인 거제에 와서 정착했다는 로맨틱한 이야기. 섬마을 처녀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던 거제의 사나이가 있었고 그 자손이 거제에 살고 있다.

아직 매물도와 거제의 끈이 끊어지지 않은 것은 그들이 거제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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