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덕기성에서 내려다 본 1980년대 모습. @둔덕면 제공
둔덕기성에서 내려다 본 1980년대 모습. @둔덕면 제공

고대 거제의 중심지 둔덕

거제는 신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살아온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거제면 산달도, 남부면 대포, 일운면 공곶이와 내도, 장목면 이수도, 칠천도와 가조도 등 거제 해안지역에 발견된 신석기 유적과 유물이 증명하고 있다. 

기록으로 남겨진 거제 역사의 시작은 삼한시대에는 두로국(瀆盧國)부터 신라 문무왕 이후 상군(裳郡)과 거제군(巨濟郡)이라는 지명을 얻으면서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독로국 및 가야시대 거제지역의 역사를 증명할 수 있는 기록 및 유물·유적의 발굴에 대한 성과는 부족하지만 둔덕면이 고대 거제에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점은 그동안 둔덕면 지역에서 발굴·조사된 성과로 알 수 있다. 

5세기부터 6세기 중·후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방하리고분군은 신라가 거제지역의 지방 세력을 흡수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으며 둔덕기성은 신라의 지배체제 정비와 관련된 역사 자료다.

방하리고분군과 인근에 위치한 거제둔덕기성 및 거제고군현치소지에서는 거제지역에 남아 있는 우리나라 고대 재지(在地)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둔덕이 거제 역사의 발원지라 불리는 것도 독로국 이후 거제의 지명이었던 상군의 치소였음을 가늠할 수 있는 ‘상사리문 토기’가 거제둔덕기성과 거제고군현치소지에서 발견돼 신라시대 거제의 지명으로 기록된 ‘상군’의 실체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둔덕면에 위치한 방하리고분군, 거제둔덕기성, 거제고군현치소지 등 세 곳의 유적은 경남에서 유일하게 치소(治所), 성(城), 무덤(古墳)이 한 지역에 남아 았다는 점에서 거제지역 최대급 유력 정치집단이 만든 문화와 변천 과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려시대까지 거제의 중심지이자 거제현 관아가 존재했던 둔덕면은 무신정변으로 유폐된 의종이 머물면서 대부분의 지명을 얻게되며, 이 시기 붙여진 둔덕면의 지명은 조선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둔덕’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425년 편찬된 ‘경상도지리지’를 보완하기 위해 편찬된 1469년 만들어진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남아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거제지역의 염분(鹽盆소금가마)을 소개하면서 “염분은 현의 북쪽 사등리(沙等里)와 오양포(烏壤浦)에, 현의 서쪽 둔덕리(屯德里) 산달포(山達浦)에, 현의 남쪽 명진리(溟珍里) 간다포(間多浦)4)·명진포(溟珍浦), 산포(山浦)에, 현의 동쪽 연초리(延草里) 오비포(吾非浦)·가이포(加耳浦)·하청포(河淸浦), 하청리(河淸里) 외포(外浦)·황포(黃浦)에 있다”고 했다.

이 기록은 둔덕면 지역의 영역이 현재 거제면 서쪽 부분까지 차지했다는 점과 당시 경상우수영이 있었던 산달포가 둔덕의 영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81년 만들어진 ‘동국여지승람’을 증수해 1530년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둔덕기성(屯德岐城)은 현의 서쪽 37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1000척이다. 성안에 못 하나가 있다. 세간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본조 초기에 고려 왕씨들이 유배되었던 곳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둔덕기성에서 내려다 본 최근 모습. @사진= 류정남 사진작가
둔덕기성에서 내려다 본 최근 모습. @사진= 류정남 사진작가

둔덕면 각 마을의 지명 이야기

둔덕면의 지명은 고려 18대 임금인 의종이 24년(1170년) 8월 대장군 정중부와 이의방이고 등이 국왕의 보현원 행차 시 순검군을 모아 호종한 문관과 대소신료 등을 살해한 사건인 무신정변과 관련이 있다. 

그해 10월 의종은 거제현 관아가 있던 둔덕면 거림리 유폐됐으며 이때 둔덕면의 지명 대부분이 만들어졌다고 전한다. 의종은 1173년 8월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복위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경주로 거쳐를 옮기게 되며, 김보당의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한 이의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둔덕면민들은 ‘둔덕(屯德)’이라는 지명은 ‘덕이 머문다’는 뜻이며, 이는 임금이 머물며 생긴 지명으로 풀이하고 있다.

둔덕면의 상둔과 하둔은 고려 의종이 상하둔에 호위군 주둔지를 두고 넓은 들판에 둔전(屯田)을 설치해 식량을 생산 공급해 생겨난 지명으로 전해진다.

# 상둔리 
▶옥동(玉洞)마을 : 산방산 넘어 북편에 옥녀봉(玉女峰)이 있다. 이 산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해 옥동(玉洞)이다.
▶유지(柳枝)마을 : 아래 둔덕, 거제 옥산, 사등 지석과 언양으로 다니던 길이 있었다. 길가에는 장승이 서 있고, 버드나무숲이 우거져 있었다. 버드나무골을 한문으로 버들 유(柳)자에 가지 지(枝)자를 사용해 유지라 한다.
▶덕리(德里)마을 : 윗골의 산등 어양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는 양지 바른 마을이다.
▶함덕(咸德)마을 : 유지마을 나무골 서쪽 밭들에 함텃골이라는 마을이다.

# 시목리 
둔덕골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위는 상둔리(上屯里)이고 밑은 거림리(巨林里)로 양지 바른 마을이다. 우두봉(牛頭峯) 밑의 넓은 초원은 고려 의종이 쫓겨와 군마를 방목해 기르면서 목장을 지켰던 곳이라 해 시목(視牧)이라 했다. 

▶시목(枾木)마을 : 고려시대 거제현의 군마를 지켰던 곳이라 해 시목(視牧)이라 불렀으나, 고려시대 삼별초와 왜구의 침입을 피해 거제현이 거창현으로 옮겨간 후 감나무를 식재하면서 시목(枾木)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장(馬場)마을 : 고려시대 마을의 넓은 초원에 국마(國馬)를 기르던 마장(馬場)이 있었다고 전한다. 1945년 광복 후까지도 혼례의 차마(車馬)로 7두(頭)를 길렀다.
▶상서(上西)마을: 상둔덕 서쪽의 새몰과 둔덕천 동쪽의 점들이 두촌락을 합쳐 상서마을이라 부른다. 

# 거림리 
둔덕면의 중앙의 위치하며 고려시대까지 거제현의 관아가 있던 곳이다. 마을 주변과 북쪽 당산등(堂山嶝)과 청룡등(靑龍嶝)에 울창한 숲이 있어 거림치(巨林峙)라 불렀다.

▶거림(巨林)마을 : 기성현 옛터가 남아 있으며 마을 뒤 우두봉의 둔덕기성이 있다. 
▶농막(農幕)마을 : 고려 의종이 둔덕에 머물 당시 둔전(屯田)을 두고 농사를 짓게 했던 곳으로 윗마을에 농막터의 촌락이 있어 망하터라 불렀다.

# 방하리 
둔덕면 중앙에 위치하고 동은 장갓재를 넘어 위대밭골, 서쪽은 둔덕천(屯德川)을 경계로 거림리이다. 남은 하둔리(下屯里)와 접하며, 북은 산방산 밑의 큰마을인 대몰 아래에 마을이 형성됐다. 본래 산방방에 속했다가 고종 32년(1895) 방하리(芳下里)가 됐고, 1915년 법정리가 됐으며 방하(芳下)와 죽전(竹田)의 행정리가 있다.

▶산방(山芳)마을 : 산방(山芳)마을은 본래 대몰이라 했는데 산방산 밑이라 산방이라 했다. 산방산 골짜기에 참나무 숯굴이 있었으며 생산된 숯은 기성현에 공급했다.
▶방하(芳下)마을 : 산방리 밑에 있으니 방하리라 했고, 1913년 처음으로 면사무소를 뒀으며 일본인의 입주가 늘어 1928년 하둔리로 옮겼다.
▶죽전(竹田)마을 : 대나무숲이 울창했던 곳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대밭골’이라 불렀다. 둔덕천의 지류로 죽전천이 있고 계곡을 따라 윗대밭골, 아래 대밭골이라 부르며 동쪽은 답답골재를 넘어 거제면 송곡으로 가는 큰 길인 ‘장갓재’가 있다. 

# 하둔리 
고려 의종이 쫓겨와 거림마을 아래 호위군을 주둔시켜 하둔덕방(下屯德坊)이라 불렀다. 장들에 둔전을 설치해 쌀과 보리를 생산해 식량을 공급했다. 

▶하둔(下屯)마을 : 둔덕만이 깊숙히 들어와 민물 때에는 통영으로 오가는 선박과 장군들의 돛배들이 드나 들었던 곳으로 교통이 편리해 아래와 윗마을이 형성돼 상촌(上村)하촌(下村)이라 부르다가 하촌 주민의 반대로 선창마을이라 부르기도 했다.
▶방답(芳踏)마을 : 하둔 동쪽 둔덕천 건너 마을로 임진왜란 이전 방답진을 뒀던 곳으로 전해진다. 기록상 전라도 여천군 돌산의 방답진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설치된 기록이 있다. 방답꿈 또는 방답구미라 부르기도 한다. 

# 어구리 
어구리의 어원은 고려 의종이 복위를 꿈꾸며 무기를 만들고 외인을 출입금지 시켜 외인금이라 부른 것에서 시작됐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하둔덕방에 속했으나 고종 32년(1895)에 어구리(於九里)가 됐다. 이 마을은 왜구들이 풍랑을 피해 들어오거나 임진왜란 때 왜구를 방어하던 곳이었으며, 둔덕면 9개 리의 끝마을이라는 뜻이라도 한다. 또 천혜의 어항이기 때문에 어구(漁口)라 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 술역리 
통영과 바다를 마주하며 서북쪽은 내평(內坪)술역(述亦)마을이고, 남쪽은 호곡(虎谷)녹산(鹿山)이 있다. 또 바다 복판에 화도(花島)가 있다. 
의종이 둔덕에 머물 당시 육지와 교역하는 수역(水驛)을 뒀기 때문에 술역(述亦)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술역(述亦)마을 : 고려시대 농수산물과 공산품을 운송하던 곳으로 수역이라 했으며 의종왕이 쫓겨왔을 때는 시종 문무관의 관수용이 불어나 항구 역할을 충족해 선박 출입이 많았다고 전한다. 
▶내평(內坪)마을 : 술역 북쪽 안들에 마을이 형성돼 내평이라 했다.
▶녹산(鹿山)마을 : 하둔에 옛날 여객선 부두가 있었다. 그러나 수심이 얕고 간조시에는 간석지가 되므로 해방 후 녹산 부두로 옮겼다. 바로 앞에 딴녹섬 또는 소록도가 있어 녹산이라 했다.
▶호곡(虎谷)마을 : 술역에서 남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바닷가 절벽에 굴이 많이 있어 옛날 호랑이가 살았다고 해서 범굴이라 불렀다.
▶화도(花島)마을 : 녹산과 통영의 바다 중간에 있는 섬으로 붉섬과 방화도가 있으며 봄철이면 진달래꽃이 온통 붉은 섬이라 해 화도(花島)라 부르고 있다.

# 학산리 
거제의 서쪽 견내량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 거제의 8개 수군진 중 영등진(永登鎭)이 있던 곳이다. 학산이란 지명은 마을의 동쪽 비학산(飛鶴山) 아래 마을이 있다고 해 붙여진 지명이며, 영등진의 관아가 있던 곳을 아사(衙舍)마을이라 부른다.

▶학산(鶴山)마을 : 조선시대 거제 수군진인 영등진이 위치해 영등이라 불렀으나 영등진이 폐영된 이후 비학산 밑에 마을이 있어 학산이라 부르고 있다. 
▶아사(衙舍)마을 : 학산의 북쪽 영등진의 관청이 있던 곳이며 지석묘(支石墓)가 산재하는 역사 깊은 마을이다. 아사의 남쪽에 영등진의 동헌이 있던 논을 마을 사람들은 동헌 터라 부르고 있다. 

마고덜겅.
마고덜겅.

고려 의종과 관련된 지명

▶현령곡(縣令谷) : 시목과 마장의 경계를 목꼴이라 하며 연중 맑은 물이 흘러 기성현(岐城縣)때 현령이 별장을 짓고 목욕을 하였다는 곳으로 오늘에는 포강이 있다.

▶두덕들 : 거림마을의 서남쪽 등성이에 위치한 곳으로 의종을 따라온 관원의 마을과 객사가 있었다.
▶마하(馬下)터 : 의종왕이 고관들이 하마하던 정거장이 있었다.

▶망골 : 거제 둔덕기성(巨濟 屯德岐城) 아래 산등성과 골짜기로 정중부의 반란군이 추격해 오는지 망을 보았다는 곳이다.

▶마고(麻姑)덜겅 : 의종이 거제둔덕기성을 고쳐 쌓을 때 옛날 전설의 신선 마고(麻姑)할미가 치마에 돌을 가져와 성을 쌓고 나머지 돌을 버렸다는 너덜을 방언으로 덜겅이라 하며 그 규모는 1ha정도다. 실제 거제둔덕기성은 신라시대 초축된 이후 고려시대 확장 및 보축된 흔적이 있다. 

▶안치봉(安置峯) : 농막(農幕)의 남쪽에 있는 산기슭에다 의종의 대비(大妃)가 기거해 대비장(大妃莊)이라 불렀다고 한다. 

▶여관곡(如關谷) : 여관곡(如關谷)또는 려관곡(麗關谷)이라 불리던 곳으로 농막(農幕)과 하둔(下屯)의 경계에 있는 골짜기에 거제현의 세금(稅金)을 수납(收納)하던 기관이 있었으며 고려의 경계라는 뜻도 있었다고 전한다.

▶역둔답(驛屯沓) : 마장마을 뒷동산 들판에 국마(國馬)를 기르는 사람들의 농토가 있었다.

▶우마장(牛馬場) : 우두봉(牛頭峯)에서 거제 둔덕기성(巨濟 屯德岐城)에 이르는 양지바른 넓은 초원에 의종이 말을 방목했고 이후 소를 놓아 길러 거제(巨濟)는 소섬, 제주(濟州)는 말섬불렀다고 전한다.

▶자주방(自主防) : 여관곡(如關谷)에 의종이 방위를 위해 군사를 주둔시킨 곳으로 자주방(自主防)이라 했다.

▶제신암(祭神岩)과 제사곡(祭祀谷) : 우두봉(牛頭峯) 꼭대기에 높이 30m의 큰 바위굴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사두등(蛇頭嶝, 뱀등) 밑 골짜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골짜기마다 논밭이 있던 흔적이 있다.
▶매주봉(埋珠峰) : 하죽전과 둔덕천에 있는 봉우리로 80년대까지 석산이 개발됐으나 지금은 정상에 청령정이 만들어져 있다. 이 곳은 의종이 거제에 쫓겨올 때 궁녀들과 신히들이 보물을 많이 가져와 추격군을 피해 보화를 묻었다고 전하는 곳이다. 

▶공주(公主)샘 : 방하마을 동편에서 죽전마을로 가는 잿길에 있는 샘으로 의종의 공주(公主)가 의종에게 차(茶)를 끓여 바치기 위해 물을 길렀던 곳이라 전한다.

▶고려(高麗)무덤 : 의종이 거제에 쫒겨 올 당시 따라온 관리들의 집단 무덤이라는 이야기와 이자겸의 난 진압 이후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이 거제에 귀향 온 후 그의 세력이 묻혔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최근 발굴조사 결과 고려시대보다 앞선 5~7세기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의 대광중학교가 임시로 학교를 운영할 때 고려시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는 목격담도 전한다. 

▶과녁터 : 하둔 서쪽과 등새미 사이에 하둔덕에 주둔하던 호위군의 활을 쏘던 과녁이 있었다고 한다.

▶장(莊)들 : 고려 의종이 쫓겨와서 선왕 인종(仁宗)의 왕비 공예대비(恭睿大妃)를 안치(安置) 시켰던 대비장(大妃莊) 앞 넓은 들판을 말한다. 

둔덕면 전경. @사진= 거제시청 김정환
둔덕면 전경. @사진= 거제시청 김정환
둔덕면 전경. @사진= 거제시청 김정환
둔덕면 전경. @사진= 거제시청 김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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