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남 신용우와 하청 맹종죽

거제 하청 맹종죽. @거제신문DB
거제 하청 맹종죽. @거제신문DB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마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는 시가 있다.

서산대사 또는 조선 후기 문신 이양연이 지은 한시로 알려져 있는데, 백범 김구 선생이 좌우명으로 삼고 애송했던 시로도 유명하다. 이 시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겠지만 그만큼 선구자(先驅者)의 길은 신중하고 험난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거제 농업사에도 이 시와 같이 살다간 인물이 있었으니, ‘거제맹종죽의 아버지’ 거제농업의 선각자로 불렸던 소남 신용우 선생이다.

선생은 1895년 10월17일 하청면 성동마을에서 신주병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아래 남동생은 거제 3대 독립운동가중 한 사람인 신용기(신철) 선생이다.

선생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성품은 온순하나 고집이 세고 한번 일에 몰두하면 끝을 보는 성격으로 평가하고 있다. 선생은 어려서 거제향교 당장을 지낸 부친 밑에서 한학을 배웠고, 1908년 거제초등학교에 입학해 2회 졸업생이 된다. 이후 부친의 뜻에 따라 진주농업학교로 진학했다.

진주농고를 졸업한 선생은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와 농촌 개척의 선구자로 가난한 농촌사람들의 희망이 된다. 그러던 중 1927년 일제는 농촌 정책의 일환으로 모범 영농인을 일본에 산업시찰을 보내게 되는데 이때 선생의 나이 22살이었다.

선생은 일본시찰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서 맹종죽(孟宗竹) 모죽(母竹) 3그루를 구해 귀국했다. 선생이 생각하기에 한반도 최남단 거제도는 아열대 지역으로 기후가 따뜻해 죽순이 자라는데 최적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죽 3그루를 가져온 선생은 자기 집 뒷산 밭에 구덩이를 파고 퇴비와 분뇨를 충분히 넣고 심어 두 그루를 생육하는데 성공했다. 생육에 성공한 맹종죽은 3년째가 되자 4~5㎏이나 되는 죽순이 말그대로 우후죽순 구덩이마다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몇년 뒤에는 일본인이나 중국요리집에서 주문이 폭주하며 적잖은 수익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생의 맹종죽이 올바르게 생장하고 팔리기까지의 여정은 만만치 않았다. 눈뜨기 무섭게 새벽달을 보며 대나무밭에 나가 생육을 관찰하고 직접 퇴비를 실어다 날랐다.

하루 세끼도 편안히 안방에서 먹지 않고 부인이 대나무밭에 날라다 줘야만 먹었다. 그렇게 몇년 동안 손발이 부르틀 때까지 오로지 ‘맹종죽’만 바라보며 살았다.

현재 남아 있는 선생의 사진은 햇살에 그을린 검은 피부와 검소하고 단정한 의복이 인상적이다. 농민의 삶을 살아온 그는 늘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았다. 간혹 선생을 찾아온 손님이 남루한 옷을 입은 농민이면 흔쾌히 만나주고 양복을 입은 사람이면 만날 수 없으니 밤에 오라고 되돌려 보낸 일화는 선생을 아는 사람 중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선생은 자신이 들여온 맹종죽 재배법을 하청면 농민들에게 가르쳐 윤택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하청면사무소의 권농사무를 담당하는 등 농촌부흥도 선도했다.
그의 나이 42세 되던 해인 1937년 2월25일에는 제5대 하청면장에 임명돼 5년간 재임했다. 당시 하청면의 야산을 개간해 대밭으로 조성하기 시작해 야산을 온통 맹종죽이 가득한 죽림으로 바꿔놨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1월13일에는 제9대 거제시 하청면장으로 재임용돼 산지에는 맹종죽과 밤나무, 밭에는 포도나무를 심는 한편 구황작물인 고구마를 다산품종으로 개량해 농민들의 살림을 윤택하게 했다.

또 1952년 5월10일 시행한 초대 경남도의회 의원 통영군 선거에서 최고 득점자로 당선됐고, 제2대 국회의원 이채오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해 거제군 복군을 강력히 건의했다.

이후 선생은 1960년 5월20일 생을 마감했다.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선생을 기리기 위해 하청면 사람들은 성동마을 앞 신작로 가장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선생의 헌신으로 하청면은 현재 우후죽순, 죽순 천지다. 하청면에서만 무려 500만여 그루의 군락지가 형성돼 현재 하청면은 국내 최고의 맹종죽 생산지가 됐다.

하청면이 사시사철 죽향(竹香)이 살아있는 맹종죽의 산실이 되기까지 선생의 지난 발자국이 후세에 길이길이 푸르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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