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의 어업 침탈과과 일본군 주둔-1910년대 이사리촌. @거제신문DB
일본인의 어업 침탈과과 일본군 주둔-1910년대 이사리촌. @거제신문DB

1876년 조일수호조약을 맺으면서 우리나라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영향권 아래 근대화를 맞는 과정에서 일본인은 우리나라 해역에 어업을 하기 시작한다. 특히 1889년 체결된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으로 일본인의 어업은 전라·경상·강원·함경 해안에서의 합법적인 어업이 가능하게 됐다. 이 시기 거제에도 일본인 어업인이 진출해 장승포, 일운면, 남부면 일대의 어장을 침탈당하기 시작했다. 

특히 장승포지역은 일본인 어업이 성행하던 곳으로 일본인 거주지역인 입좌촌(入佐村)이 만들어졌고 1877년 11월에는 우편소까지 세워졌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 우편행정관서인 우정국(현 우정사업본부)은 1884년 개국했다. 일본인 이주가 지속된 장승포는 1910년 일본인 234가구에 1893명이 거주하는 신흥도시였다. 

일본의 침탈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직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고종은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아관파천)하면서 친러내각을 수립한 뒤 경운궁으로 환궁해 황제국을 선포하고 대한제국을 건국했다. 1896년 러시아는 마산포와 거제도 일대를 조차지로 삼아 일본·미국 등을 견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을 이용해 동아시아 지역을 장악하려 했던 일본의 반대로 마찰을 빚게 되고 러시아와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 준비를 위해 일본군은 러시아의 침략을 막는다는 구실로 1904년 대한제국과 체결한 외교 문서인 '한일의정서' 4조를 내세워 거제도 전역에 군사시설을 설치하기 시작한다. 

일본은 1903년 거제지역을 군사기지화 하기 위해 장목면 송진포에 '가근거지 방비준비대'를 조직했다. 1904년 9월 저도와 가조도를 군용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또 거제 전 지역에 신호소(대금산·계룡산·죽림포)와 군사시설(저도·관포·저구·탑포·죽림포·하청·칠천도·가조도·한산면)을 설치했다. 가조도의 부속섬 취도에서 함포사격을 연습했다. 

일본은 러일전쟁뿐만 아니라 중일전쟁·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거제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사용했다. 지심도의 군사시설은 1938년 중일전쟁을 앞둔 1936년 설치됐으며, 저도의 포진지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 최후 방어선 구축을 위해 만들어졌다. 

근포땅굴은 1943년 시기 일본의 진해사령부가 거제도와 가덕도 일대에 방호용과 잠수함 기지(어뢰정)로 만든 동굴 중에서 하나로 추정된다. 근포땅굴 외에 거제 능포 양지암과 장목·남부면 지역에는 방호용 동굴이 다수 존재한다.

★ 한국사 산책 = 대한제국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1897년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10월에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대한제국은 자주독립 국가임을 밝히고 국방력을 강화시켰다. 내각은 보수파를 중심으로 구성돼 왕권강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이런 움직임은 독립협회의 저항을 받았다. 독립협회는 의회 개설을 주장했으나 정부 탄압으로 강제 해산됨으로써 왕권의 전제화 경향은 더욱 커졌다.

1904년 일본이 러일 전쟁을 일으켰고 대한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했으나 일본의 위협으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고 이듬해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조선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조선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으나,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1910년 강제로 대한제국을 일본에 병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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