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는 임진왜란 전후 고현성을 읍치로 삼았던 시절 남명 조식의 학통을 계승한 지역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남명 학파의 계승과 세력이 약해졌고 2차 예송논쟁에서 밀려난 성리학의 대가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1679년 3월 거제도로 유배 오면서 거제는 송시열 및 노론계 학통이 널리 숭상된다. 

송시열은 73세 때인 1679년 3월25일부터 1680년 5월15일까지 거제에서 1년 남짓 귀양살이를 했다. 이때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거제를 비롯한 유배지에서도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를 집필해 거제의 유림에게 큰 영향을 줬다. 그가 떠난 후에 거제 유림들은 유배지 배소에 간략한 사당을 세우고, 학문을 연구하는 장소를 만들어 추모했다.

특히 송시열의 유배에 이어 1689년 죽천 김진규와 1722년 김창집 선생이 연이어 거제면 동상리로 유배 오면서 반곡서원 일대가 도론동(道論洞)이라 불릴 정도로 사풍(士風)이 일어나 거제도는 유학의 절정기를 맞을 수 있었다. 

거제면 동상리 반곡서원은 1704년 송시열 문인인 전극화(全克和·1648 ∼1718년)를 비롯해 거제의 선비들이 힘을 모아 창건한 영남 노론계 서원으로 사립 교육 기관의 기능을 했다.

반곡서원 모습. @거제신문DB
반곡서원 모습. @거제신문DB

★ 한국사 산책 = 예송논쟁

예송논쟁은 효종 승하 후 현종 즉위 직후 효종의 의붓 모후인 장렬왕후가 행해야 했던 상례 격식을 두고 서인과 남인 간에 여러 차례 격렬하게 벌어졌던 학술적·정치적·사회적 논의를 말한다. 

1차(기해예송 1659년)는 효종이 사망한 이후 모후인 장렬왕후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규례'를 두고 일어난 논쟁이다. 그리고 2차(갑인예송 1674년)는 장렬왕후가 며느리 되는 인선왕후에 대해 상복을 몇 년 동안 입어야 하느냐로 벌인 논쟁이다.

이 논쟁은 당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전제 왕조 국가 조선에서 왕의 정통성이 걸린 중대한 논쟁이었다. 이후 환국과 연결돼 조선 정치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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