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포해전은 1594년 11월12일~12월29일(음력 10월1일~11월18일)까지 장문포(장목면)를 중심으로 수륙 합동작전으로 진행된 해전이다. 제1차 장문포해전·영등포(永登浦)해전, 제2차 장문포해전으로 나눈다.

장문포해전은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였던 옥포해전이나 일본군의 전의를 상실하게 했던 견내량해전(한산대첩)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전투다. 

하지만 조선군과 일본군 최고의 명장이 한자리에 모인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이자 조선의 수륙군 양동작전이라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전투이기도 하다. 장문포해전에 참가한 장수의 이름을 나열해 보면 조선군은 통제사 이순신·홍의장군으로 이름을 떨친 육병장 곽재우·충용장 김덕령이 출전했고, 행주대첩의 권율이 후방을 지원했다. 이에 맞서는 일본군은 제2진 사령관인 가토 기요마사·노량해전의 지휘관 시마즈 요시히로·제5진 사령관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장문포왜성과 송진포왜성에서 수성했다.

장문포해전이 조명받지 못한 이유는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 치른 9차례(17회)의 크고 작은 해전중 가장 성과가 미미한 전투라는 점과 육지전투에서 불패신화를 이룬 홍의장군 곽재우가 승리하지 못한 유일한 전투여서다.

이는 당시 일본군은 앞서 벌어진 이순신과의 해전에서 전력 차이를 경험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순신과 바다에서 싸우지 말라는 명령 때문에 방어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선군은 장문포 앞바다와 영등포로 이동해 수차례 싸움을 걸었으나 일본군은 성에 꼭꼭 숨어 응하지 않고 싸움을 피하기만 했다. 곽재우와 김덕령도 군사 수백명을 이끌고 육지로 상륙해 조선 수군의 함포사격을 지원받아 장문포왜성에 접근했다. 그러나 조총으로 무장하고 수성하는 왜군의 방어를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장문포해전의 당시 도체찰사 겸 좌의정 윤두수가 원균에게 건의를 받아 독단적으로 전투명령을 내리면서 시작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의정 유성룡이 선조(宣祖)의 허락을 받아 작전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명령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전투가 진행됐고, 그 결과 별다른 성과 없이 고작 정박중인 왜선 2척을 부수는데 그쳤다.

임진왜란 최초의 수륙합동작전이 펼쳐진 장문포왜성. @최대윤
임진왜란 최초의 수륙합동작전이 펼쳐진 장문포왜성. @최대윤

 

★ 한국사 산책 = 임진왜란의 의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 각 지역의 유학자나 승려들은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에 대항했다. 의병은 임진왜란 초기에 관군이 재정비해 일본을 물리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은 2만2600여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일본군에 비해 무기나 전술적인 면에서 열세를 면할 수 없었지만, 지리에 익숙하고 적절한 전술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임진왜란 의병 중 가장 먼저 일어난 의병은 경상도 의령에서 봉기한 곽재우였다. 또 경상도 합천의 정인홍, 고령의 김면, 영천의 권응수가 의병을 일으켰다.
이밖에 전라도 담양의 고경명·김천일·박광옥, 충청도 옥천의 조헌·이우·김경백·전승업·승병 영규, 경기도 안성의 홍계남·우성전, 황해도 이정암, 평안도 승려 휴정, 함경도 정문부·정형룡·오응태 등이 활발한 의병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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