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은 견내량해전 이후 남해안 일대를 점거하고 근거지를 확보와 상호 연락을 위해 성을 쌓았다. 

일본군은 정유재란 시기까지 30여개 이상의 왜성(倭城)을 남해안 일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크게 두 가지 목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연결성(連結城)으로 일본군의 군수물자의 보급로 확보를 목적으로 쌓은 성곽이다. 일명 '쓰타이노시로(つたいの城)'로 불리며 군대가 거의 하루에 행군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쌓았다. 주로 조선의 읍성을 고쳐서 사용하거나 적당한 읍성이 없는 곳에서는 새로이 간단하게 축성했다. 

둘째는 통치성(統治城)으로 주로 조명 연합군과 휴전(1593년 1월8일 평양성 탈환 이후)부터 1597년 정유재란 사이에 쌓은 성이다. 

휴전 후 일본군은 내륙에서 후퇴한 뒤 전세를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쌓은 10여개의 성곽과 정유재란 시기에 신규로 축성한 8개 등 20여개 이상의 성을 쌓는다. 

일본 측 기록에는 거제에 약 7개의 왜성을 축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기록상 남아 있는 왜성의 흔적은 견내량·장문포·송진포·영등포(구영)왜성과 지세포성 정도다. 

거제에 남아 있던 주민과 포로들을 동원해 쌓은 영등포·장문포·송진포 왜성은 왜군의 최후 주둔지 역할을 했고, 정유재란 이후 쌓은 광리(견내량)왜성 조선 수군 연합 함대와 조명 연합군으로부터 거제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 한국사 산책 = 정유재란

조선 수군의 해상 장악 이후 일본군은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전황이 불리해졌다. 1593년 1월8일 평양성 탈환 이후 명(明)과 일본군 양측은 서로 자국이 유리한 처지에서 화의 교섭에 나서면서 휴전이 시작됐다. 그러나 조선은 명나라와 일본의 교섭이 이뤄지는 동안 병력을 키우며 교섭에 반대했고,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철군해 왜성을 축조하고 전투를 중단한 채 주둔했다.

일본군은 명나라 황녀(皇女)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고 조선 팔도 중에서 남부 4도를 내줄 것과 감합 무역(勘合貿易)을 부활할 것, 조선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과 명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전회담이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조선을 침공해 이듬해인 1598년 12월까지 전쟁을 이어 갔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정명가도(征明假道-명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의 길을 빌려달라)' 요구로 전쟁을 일으켜 북진을 위한 전투가 목적이었다. 정유재란은 일본이 조선 영토 장악을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 백성의 살육과 수탈이 가혹했다. 

정유재란은 선조 31년(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죽음을 계기로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마무리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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