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전 거제문협 지부장
김정희 전 거제문협 지부장

친정에 가면 거실 한구석에 낡은 의자가 있다. 오랜 세월 거실에 버티고 있는 의자는 이제 그 수명이 다하여 언제고 버려질 듯한 모습이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다니러 왔을 때 내다 버린다고 하면서도 막상 버려지는 게 아쉬운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두 종류의 책상이 있었다. 하나는 앉은뱅이책상이요, 다른 하나는 의자가 딸린 책상이다. 앉은뱅이책상은 오빠가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 아버지가 직접 목재소에서 자재를 구해 와서 짜주신 책상이다. 아버지는 그 책상에서 올망졸망 공부하는 우리를 보고 무척 흐뭇해했다. 

의자가 딸린 책상은 오빠가 고등학생이 되던 해 아버지의 입학 선물로 우리 집에 들어온 책걸상이다. 그 당시 호마이카 칠을 한, 그런 책걸상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자줏빛 윤기가 흐르는 책상과 걸상은 우리 온 가족의 귀애하는 가구로 자리매김했다. 당연지사 오빠 차지가 된 그 책걸상은 동생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우리 사남매는 삼년 터울로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있었다. 동생들은 틈만 나면 의자가 있는 책상에 앉아보겠노라고 쟁탈전을 벌이곤 하였다. 나는 오빠가 놀러 간 사이 얼른 그 책상 의자에 앉아서 의자를 한 바퀴 돌리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시간을 30년 전으로 되돌려본다. 날이 밝으면 그 의자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던 생전 아버지의 모습이 투영된다. 사 남매의 온갖 개구쟁이 짓으로 생채기투성이인 그 의자는 자식들이 각자의 둥지로 떠난 후 아버지의 의자가 되었다. 

정년퇴임을 하신 아버지는 부상의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하여 보행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아버지는 날이 밝기만 하면 어김없이 그 의자에 앉아서 거실 밖 세상을 구경했다. 아버지의 일상은 늘 의자와 함께했다. 아버지는 낡은 의자를 벗 삼아 불편한 몸을 의지하면서 거실 너머 세상과 소통하려고 했다. 망부석처럼 지나간 청춘과 세월을 회상하며 떠나간 자식들을 그리워하는 상념의 시간이 늘어만 갔다.

평소 호수같이 조용하게 가정을 이끌어 오신 아버지. 때론 술이 얼큰한 날이면 6.25전쟁 통에 산산이 해체된 가족사에 대한 기억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어렸던 나는 슬픈 아버지의 모습을 따라 울먹이곤 했다. 어설프게 싼 상추쌈을 내 입에 넣어 주시던 모습과 가끔씩 엄마 몰래 과자 사먹으라고 50원짜리 동전을 건네주던 모습이 선하다. 그리고 아주 가끔 기분이 좋으시면 노래를 흥얼거리시던 그리운 아버지. 

언젠가 보았던 1인극 ‘벽속의 요정’이 눈앞에 그려진다. 극의 내용은 전쟁 탓에 부당한 오해를 받아 수십 년 동안 벽장 속에 숨어 지내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벽장 속에서 딸아이의 성장과정을 남몰래 지켜보아야만 했던 아버지와 가족들의 이야기다. 나는 연극의 장면 장면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교차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느꼈을 고통과 딸에게 주었을 사랑이 묵직한 그리움으로 다가온 때문이다. 그날 그 한편의 연극은 나에게 잊고 살았던 아버지와 아버지의 고향, 아버지의 어머니인 할머니를 포함한 혈육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쉽게 그리고 강렬하게 되살려 주었다. 

군인으로 사신 아버지는 국립묘지에 잠들어 계신다. 아버지는 생전에 남북통일이 그토록 강렬한 숙원이었지만 당신 세대가 겪은 분단의 아픔은 세월이 흐르면서 시나브로 잊혀 간다면 안타까워했다. 돌아가시기 두 달 전 내손을 꼭 잡고 거가대교가 완공되면 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고 싶다던 소박한 아버지의 소망은 영영 꿈으로 끝나버렸다.  

오늘따라 한없이 애처로워 보이는 아버지의 의자. 아버지의 살아생전 모습이듯 의자를 바라보노라니 내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다 못한 효도에 가슴이 저며 온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세상에서 가장 성능 좋은 안마의자를 사드리고 싶다. 평생 고생하신 아버지에게 딸이 해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는 떠났지만 낡은 의자는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서 오가는 자식들이 저마다 아버지와의 추억을 꺼내보는 추억의 의자가 되었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본다. 아버지의 체온이 느껴지는 듯하다. 아버지가 언제까지나 우리를 바라보고 힘이 되어 주신다는 확신이 느껴진다. 

아버지의 분신 같은 그 낡은 의자에 투영되는 아! 그리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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