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연 거제수필문학
유정연 거제수필문학

방학을 맞아 작은아이와 한동안 집을 비웠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큰아이와 살뜰하게 지낸 남편이었지만 집안 곳곳은 어수선했다. 냉장고 안에는 버리기도 먹기도 애매하게 남은 음식들로 가득했다. 정리되지 않은 옷가지들, 왠지 시들해 보이는 식물. 원래 나의 자리가 이리도 빛나는 자리였던가.

엄마로서의 빈자리, 아내의 빈자리, 집을 떠나가 있는 동안 내 빈자리는 너무나 커 가정의 중심은 마치 나로 인해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물건들이 이곳저곳에 널려있다. 집안을 둘러보니 몸과 마음이 어수선하다. 오랜만에 집으로 왔으나 한가롭게 여유를 즐길 틈이 없다.

반들반들하니 살림하는 재주는 없지만 부지런히 몸을 놀린다. 집안 곳곳에 수북이 쌓인 먼지들이 무미건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집에서 가장 넓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장 앞에 섰다. 사춘기시절 서점주인이 장래희망이었던 때가 있었으니 유독 책 욕심이 많았다. 엄마가 큰 마음먹고 문학전집을 사줬을 때는 얼마나 기뻤는지 정말 착한 딸이 되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했는지 모른다. 

서점주인은 되지 못했지만 아직까지 책 욕심만큼은 과하다. 이런 내게 책 욕심을 더욱 부채질했던 분이 계셨으니 첫아이의 교장선생님이다. 학부모 총회에 가면 교장선생님마다 하는 말씀은 매번 비슷하다. 그러나 새로 온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다른 분들과 달랐다. 누군가 선생님을 아동문학을 하는 분이라고 했고 또 다른 학부모는 시인이라고도 했다. 어떤 분이시던지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그동안 내안에 숨어있던 것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욕심나는 책이 어디 한두 권이랴. 두 남매를 위한 필독서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서점을 내 집 드나들듯 하며 문학과 관련된 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책장을 가득 채우는 책을 보는 것만으로 흐뭇했다. 이것은 보물이다. 세상이 달라졌다 해도 우리들의 마음을 채우는 것이 책 아니던가. 비록 컴퓨터나 스마트기기로 인해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들이 줄었다 해도 독서만큼 사람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시간은 사람의 다짐도 흐물흐물하게 만드는 것인지, 이 보물들이 무겁게 내려앉은 먼지를 이고 있다. 책 틈을 손가락으로 쓸어보니 뭉치가 제법 크다. 이 뭉치가 나의 버려진 시간 같고, 지금 부끄러운 나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니 새삼 돌아앉은 내 습관들이 상기된다. 

일을 하면서 바쁘기도 하고 사람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보니 마음의 상처가 깊어지기도 했다. 웃으면서 보내는 하루에도 채워지지 않는 내 마음은 빈곤해져 가고 있었다. 이 공허함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친한 친구들을 만나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신나게 수다를 떨어도 보지만 텅 빈 가슴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때 그분과의 우연한 만남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허한 가슴을 채우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가슴에 울림을 주셨던 분이라 존함도 잊지 않고 있었던 그 분과의 만남.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꺼져가던 심지에 또 다시 불을 붙였다. 관공서에 볼 일을 보러 갔다.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던 중 의자 위에 펼쳐진 지역신문이 있어 슬쩍 보니 문예교실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작은 홍보박스가 눈에 띄었다. 순간 떨리는 가슴으로 신문을 집어 들었다. 재빨리 모집기한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곧장 접수를 하였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 얼마나 설레었던지 뽑아 든 번호표 순서를 지나칠 뻔 했으니 말이다. 

오래 전 우리집 벽을 온통 책으로 채우게 했던 선생님을 이제는 나의 스승으로 만나게 됐으니 참으로 귀한 인연이다. 아직도 털어내야 할 먼지는 남아있으나 커피를 마신다. 커피의 그윽한 향이 심란했던 마음을 가라앉힌다. 느긋한 마음으로 책장을 바라본다. 내 머릿속으로 채워지는 문학의 이야기가 한권의 책이 되어 이 책장에 꽂히게 될 날을 상상해보니 입가에 웃음이 머문다. 

책장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다. 아무리 털어도 또 다시 내려앉을 먼지지만 이렇게 꽂아 둔 책에 먼지가 뭉치가 되어 있을 시간은 이제 주지 않아야겠다. 날려버린 먼지와 함께 자리를 내 주지 않으려는 겨울의 끝자락도 날려갔으면 좋겠다. 봄은 아직 내 곁에 오지 않았지만 얼마 후면 내려앉을 봄을 맞이하려면 내 마음속의 먼지부터 털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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