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창수 목사
천창수 목사

죽음을 피해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에는 순서도 없다. 사람이 강한 것 같아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며칠 전 입원했던 적이 있다. 내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 저녁에 한 사람이 입원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갑자기 호흡곤란이 왔고 의사와 간호사들의 애타는 노력에도 결국 숨지고 말았다. 감기로 입원했던 40대 중반의 남자 환자였다.

아마 퇴근 후에 가벼운 마음으로 입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숨이 끊어지리라고는 본인도 가족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의 부자 가운데 윌리암 할스트라는 사람은 60세가 되었을 때 자기 자녀와 친척, 친구들을 불러놓고 "앞으로 내 앞에서는 농담이라도 절대로 죽음이라는 단어는 입 밖에도 꺼내지도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어쩌면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지 모른다. 

반면에 로마의 한 황제는 신하들이 아침에 자기를 알현할 때마다 "폐하시여, 죽음을 기억하십시오" 하고 인사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윌리암 할스트라는 부자는 죽을 때 매우 고생하면서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갔고, 이 로마의 황제는 아주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죽음은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만 승리를 줄 수 있고 안식과 평안을 줄 수 있다는 하나의 교훈일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한다. 우리는 이 죽음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머지않아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알고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5) 한다. 

구약시대 제의에서 마지막 절차가 제물에 포도주를 붓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전제이다. 전제와 같이 부어졌다는 것은 이제 마지막 순간이 왔다는 것이다.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알고 항상 죽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죽음이 무엇인가?

죽음은 먼저 떠남이다. 죽음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육체를 떠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떠남은 소멸의 의미가 아니다. 허무나 종말의 의미가 아니다. 

바울이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할 때의 떠남은 항구에 매여 있던 배가 닻을 올리고 떠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것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여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죽음도 새로운 여행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자요 지도자였던 본 회퍼가 반 나치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혀 교수형을 받게 됐다. 

간수가 본 회퍼에게 "나갑시다" 할 때, 본 회퍼는 마지막이 왔음을 알고는 동료 수인들에게 이런 인사를 남겼다고 한다. 

"이제 저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결코 저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저는 새로운 여행을 위해서 출발합니다." 

죽음 앞에서의 얼마나 당당한 고백이었가? 성경이 가르치는 죽음은 바로 떠남인 것이다.

나아가서 죽음은 만남이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아마 가장 큰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단절 때문일 것이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떠나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부터 떠나야 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죽음은 다시 만남에 대한 약속과 소망이 있다. 죽음은 그토록 사모하던 주님과의 만남이요, 그 주님 안에서 앞서간 성도들과의 만남이요,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만남인 것이다. 

죽음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죽음은 더이상 두려움이 아니다. 새로운 출발이요, 만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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