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영 시인
김무영 시인

시인 청마 유치환 선생이 떠나신 지 70년이 다 돼간다. 해가 가도 자꾸 그리워져 부르고 싶은 이름이다. 70이란 숫자를 놓고 보니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08년 청마기념관이 준공되는 시점에 맞춰 제1회 청마문학제를 개최했다. 거제문협에서 주관했는데 그때 필자가 회장을 맡고 있었다. 문학제 준비를 위해 선생이 재직했던 경주중·고와 대구여고를 방문했었다. 

청마의 시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졌다는 시비가 석굴암 입구에 있었다. 언뜻 봐도 오래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목놓아 터뜨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로 시작해 '적적히 눈감고 가부좌(跏趺坐)하였노니'로 맺는 '석굴암 대불' 시였다.

청마가 교훈으로 남겨 후학들을 일깨웠던 흔적들이 교정마다 깃들어 있었다. 마치 교장도 동문인 대구여고에서는 동문회장을 만났다. 은사였던 청마의 가르침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청마문학제에는 동문들을 이끌고 버스로 참석하기도 했다. 

청마기념관 개관식과 함께 개최한 청마문학제에 선상문학도 가세해 분위기를 띄었다. 그날 청마의 막내딸 자연은 "아버지가 거제에서 출생했다는 이야기를 할머니(청마선생 모친)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청마의 세 딸들은 부모님 묘소 아래 잠들길 미리 유언했다. 청마의 막내딸이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시댁은 안동 권씨 집안으로 출가외인이라는 점을 내세워 거제에 묘를 쓰기가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부모님의 묘소까지 왔지만 순탄하지는 않았다. 묘소로 가는 길에 막내딸의 시아버지인 '개나리'를 작곡한 권태호 작곡가를 떠올리며 개나리를 들고 가서 묘소옆에 식재 순서를 넣었다. 그 순간 분위기는 반전돼 무사히 마무리 됐고, 몇 해를 건너 둘째·장녀까지 차례로 부모님 묘소 바로 아래 잠들게 됐다.

그토록 거제에 잠들길 바랐던 딸들의 소원이 마무리된 것이다. 둔덕 지전당골 청마 묘소에는 청마의 부모님을 비롯해 부인과 세 딸들까지 함께 잠들어 있다. 이로써 청마 태어난 곳이 거제 둔덕골이라는 것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청마에 대한 출생지 논란이 인 적이 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진행중일지도 모른다. 이는 청마에 대한 신념 부족에서 비롯된다. 선생을 연구하고 문학의 참뜻을 받들고 잇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증거다. 

청마의 숭고한 문학을 위해 우리는, 거제인은 무엇을 했는가. 더군다나 청마를 기리기 위해 청마기념관에서 유급 종사자들까지 둔 상태다. 그리고 청마기념사업회라는 조직까지 갖춰져 있다. 이 단체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청마에 대한 무한한 헌신이다. 회원으로서 무슨 혜택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단체다. 단체의 장은 더 열심히 청마문학을 연구하고, 회원들에게 연구하는 분위기를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

어느 지역보다 청마에 대한, 청마문학에 대한 지식과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하고 그 연구는 끊이지 않아야 한다. 만약 그들이 청마를, 청마문학을 자신의 것처럼 소유의식을 가졌다면 오산이다. 청마는 민족의 시인이기에 어느 특정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청마의 흔적들의 전국 곳곳에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한국시인협회·작가협회를 활성화하려는 노력이며,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해 용기를 주는 손길 하나하나 찾아내 그 뜻을 이어받아야 한다.

청마의 이름을 걸고 행사를 할 때에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참신하게 할 필요가 있다. 청마는 거제나 통영이나 지역문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전국 규모가 돼야 하는 것이다. 

출생지 논란의 종지부는 청마기념사업회나 거제문인협회의 노력에 달려 있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행사도 기념관 업무도 청마의 이름에 걸맞게 갖추고 이끌어야 한다. 전 국민이 청마기념관을 찾고 생가며 묘소를 찾았을 때 청마의 문학과 철학을 제대로 알려 감동받게 할 때 청마는 거제 출생이고 거제인이라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먼저 인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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