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태 수필가
서용태 수필가

내 나이 11살 때였다. 그해도 계묘년이었다. 내가 그 때를 잊지 못하는 것은 삶과 죽음을 경험한 해였기 때문이다. 죽을 만큼 배고팠던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다. 계묘년에 긴 장마로 보리농사를 망쳤으니 그 여파가 다음 해 봄으로 이어졌다. 면사무소로부터 밀가루를 배급받으면 아홉 식구가 두 끼 수제비를 끓여 먹을 양밖에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바구니를 들려 들로 내몰았다. 쑥을 뜯어와 쑥버무리를 만들어 먹기 위해서였다. 형들을 따라 칼과 바구니를 들고 논두렁·밭두렁·하천 둑길을 헤집고 다녔다. 배는 허기져서 고픈 데 쑥 바구니는 잘 차오르지 않고 따가운 봄 햇살만 우리를 괴롭혔다.

꼭 육십 년 전의 계묘년, 유월 망종을 며칠 앞둔 시점이다. 그해 우리 집 일천오백 평 밭에는 보리가 튼실하게 잘 자랐다. 형들과 내가 보리를 베어내면 아버지는 단으로 묶었다. 보리베기가 끝나면 보릿단을 지게에 지고 집 마당으로 옮겼다. 막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후둑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경험상 아버지는 지나가는 비일 것이라 했다. 그런데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며 급히 밭으로 향했다.

하루 이틀이면 그칠 줄 알았던 비는 꼬박 달포 동안 내렸다. 자꾸만 꺼져 내려앉는 보리 낟가리를 보면서 아버지의 수심은 깊어졌다. 보리 낟가리 높이가 줄어든다는 것은 빗물이 배어 보리가 모두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보리 낟가리에 파란 보리싹이 돋아났다. 그때의 아버지 심정은 보리 낟가리처럼 무너져 내렸으리라.

비가 달포를 내렸으니 온 동네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하천 둑이 허물어져 범람했고 농토는 폐허가 되어 모내기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마을 갯가에 집이 다섯 채 있었는데 두 채가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세 번째 집터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집은 재봉틀로 삯바느질로 자식들 공부시키며 근근이 살아가는 과수댁 집이었다. 그녀는 저 안에 재봉틀이 있다며 울부짖었다. 그때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청년이 기울어가는 집안으로 번개처럼 뛰어 들어가 재봉틀을 가지고 나왔다. 순간 집터와 집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 청년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달포 후에 비는 그쳤지만 그때부터가 고생이었다. 아홉 식구의 명줄이 걸린 보리는 한 톨도 성한 것이 없었다. 고구마 수확 때까지 아홉 식구가 먹고 살아갈 식량을 구할 길도 없었다. 그나마 미국의 구호식량이 도움이 되었다.

초등학생들까지도 도시락 없이 그냥 학교에 가야만 했다. 학부모가 순번을 정하여 옥수수가루에 약간의 분유를 섞어 죽을 끓여 급식했다. 옥수수가루 죽은 따뜻할 때는 그런대로 먹을 만했으나 식으면 이상야릇한 냄새 때문에 다 먹지 않고 남겼다가 담임선생님에게 들켜 혼이 난 기억이 생생하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도 먹을 것이 없었다. 어머니는 파랗게 싹이 돋은 보리 이삭을 뜯어와 온돌방에서 말렸다. 곰팡이 냄새가 배어있는 보리 알맹이를 볶아 맷돌로 갈아 죽을 끓여냈다. 그밖에도 고구마 수확철인 시월 중순까지 톳나물밥, 비에 젖어 썩어가는 통보리를 삶아 사카린을 쳐서 먹으면서까지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올해가 그 악몽 같았던 육십 년 전의 계묘년이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초근목피(草根木皮)의 보릿고개를 겪었던 해, 모든 생명의 생존에 꼭 필요한 비일지라도 알맞게 내리지 않으면 재앙으로 변하니,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과유 불급(過猶不及)의 지혜를 일깨워준 계묘년이었다. 다시 돌아온 계묘년, 부디 무탈한 새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