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재 (사)흥남철수작전 기념사업회장
이인재 (사)흥남철수작전 기념사업회장

1·2차 세계대전·월남전·한국전쟁 등 20세기 있었던 수많은 전쟁 중에서도 두 개의 철수작전이 많이 회자된다.

하나는 1940년 5월28일부터 6월4일까지 있었던 프랑스의 던커어크(Dunkirk) 철수작전으로 총 34만명의 영·불연합군이 독일군의 추격을 피해 던커어크에서 무사히 영국으로 빠져나온 작전이다.

또 하나는 1950년 12월11일부터 12월24일까지 있었던 흥남철수작전으로 이다. 인원은 20만명으로 숫자로는 던커어크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작전 계획에 전혀 들어있지 않았던 민간 피난민들이 10만명이나 섞여 있었다는 점에서, 던커어크보다 훨씬 고난도 철수작전이었다.

이때 남한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생명을 구해준 미군과 남한 주민들에게 보은하자는 뜻에서 설립한 것이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이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한 것이 흥남철수작전기념공원이다. 

기념공원에는 기념탑과 기념조형물이 설치돼 있는데, 이는 거제시와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가 2002년부터 2007년에 걸쳐 공동으로 조성한 것이다. 기념공원은 장소가 매우 협소하고, 일반 공원들처럼 대중들이 모여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은 없다.

그러다 보니 일반 공원과는 다른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흥남철수작전의 주체였던 미군측 인사들이 대상에서 빠져 있다는 것이다. 10만 한국 피난민들의 생명을 구해준 아몬드 장군이나 라루 선장의 제대로 된 기념물이 없다. 뒤늦게나마 이분들의 기념물(동상 또는 흉상 등)을 조성하는 것은 본회의 당연한 의무이자, 한미 동맹 강화의 차원에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둘째, 한국측 인사로는 김백일 장군 동상 하나뿐인데, 그나마도 그의 친일 행적 때문에 동상 옆에 단죄비가 서 있다는 것이다.

추모 공원에 단죄비라니, 무엇을 단죄한단 말인가? 내용인즉슨, 김백일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복무하며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을 탄압했다는 것. 이는 김백일이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되면서 유래한다. 그는 해외(만주)에서 '군경 특무조직(간도협조회·간도특설대 등) 하사관급 이상의 간부'로서 복무했기 때문에 친일명부에 수록됐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 만든 대대급 소규모 특수부대로, 일제 패망시까지 간도 및 열하지역에서 동북 항일연군과 팔로군 토벌 작전을 폈던 부대다.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에 의하면 부대 창설 무렵 항일 연군은 이미 소멸돼 주로 중국 팔로군을 상대로 싸웠다고 하며, 김백일의 경우 초기 가입(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불명) 기록 외에 부대 내에서의 활동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김백일은 해방 후 제5여단장으로 여순 반란군을 진압했고, 육군 보병학교 초대 교장·2군단 창설·6.25전쟁 당시 제1군단장으로서 낙동강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군단 예하 3사단은 1950년 10월1일 최초로 38선을 돌파해 10월1일을 국군의날로 기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군 경력을 다소 장황하게 구술했으나, 이는 민족문제 연구소의 친일인명 선정에 반박하거나 그의 공과를 논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누구도 그의 일생을 심판할 권능은 없다고 본다.

다만 흥남철수작전 당시 엄청난 군사적 어려움을 무릅쓰고 한국 동포들을 구출해준 ①미군들의 인류애, 10만 동포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미군을 설득해 이뤄냈던 ②김백일 장군 등의 희생정신, 기아와 추위에 떨던 피난민들에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뻗어준 ③거제도민들의 동포애에 감읍하고 그 은혜의 만분지 일이나마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뿐이다. 따라서 본 공원의 설립 취지에 맞지도 않고, 내부 분열의 상징인 단죄비는 마땅히 제거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참고로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했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70주년을 맞아 본회는 거제도 기념공원에 흥남철수작전 영웅들의 기념물을 추가 설치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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