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정 수필가
강미정 수필가

한숨이 나온다. 책상 위 군데군데 흩어져있는 이면지 종이들. 일정하지 않은 글자로 질서 없이 긁적인 흔적들. 이 글들을 보고 있으니 아침 길을 나서며 퍼석한 긴 파마 머릿결이 엉켜있던 아가씨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정리되지 못한 책상이 마치 헝클어진 머릿결같이 느껴졌다. 글자뿐 아니라 어지럽게 그려놓은 곡선 직선들 탓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렇게나 적혀있는 그 모든 활자체가 갑자기 머릿속에서 먹구름이 된다. 그 먹구름은 비가 오기 전 신호를 보내는 허리통이나 두통처럼 내게 통증이 되고 있다.

집을 나서는데 식탁 위에 놓인 독촉장이 보인다. 지난달 세금 신고 기간을 놓친 신고독촉 용지다. 세무서를 몇 번이나 갔었는데 독촉장이라니, 갑자기 짜증이 뱃속 저 아래서 역류한다. 한 달 내내 뭘 하느라 이걸 놓친 건지, 한심스러운 생각에 용지를 누군가에게서 빼앗듯 잡아챘다.

출근해서 마음을 가다듬으며 이면지 위에 오늘 할 일들을 정리했다. 제일 먼저 세무서 꼭 가기라고 결심을 담아 야무지게 적었다. 적은 글을 다시 머릿속에 새기는 중 메시지가 왔다. 지난달 시에 제출한 공모사업 서류 보완자료에 대한 독촉이다. 일주일 전 문자 받은 걸 잊고 있다가 다시 발송되어 온 걸 보면서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에 돌덩이가 하나 더 얹어지는 기분이다.

종이 위에 한 줄을 더 써넣는다. 보완서류 꼭 하기. 생각났을 때 해야지 하며 서류를 작성하는데 이번엔 단톡방 카톡 소리가 났다. 톡 방에는 글 쓰는 모임의 과제 얘기로 다들 한마디씩 한다. 주제에 대한 글을 이렇게 썼네, 저렇게 썼네, 기분 좋은 대화를 보며 나는 과제를 잊고 있었음을 기억했다. 돌덩이는 다시 여러 개가 되어 무거운 마음에 더욱 무게를 얹는다.

그뿐인가 내일까지 필요한 몇 개의 수업자료와 빨리 해결해야 할 일 두어 가지가 더 있었다. 미루다 한꺼번에 강풍이 되어 내게 불어 닥친 것 같았다. 강풍은 미간을 찡그리고 몸을 움츠리며 굳은 자세가 되어 피곤하게 만든다.

지인중 할 일이 생기면 바로 해야지 절대 미루고는 못 배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이 깔끔하다. 인간관계 일 생활 속 사소한 행동까지도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철저해 보이는 이들의 모습에 인간미가 떨어진다는 얘기도 하지만, 뭐 하나 개운한 마무리가 안 되는 사람들의 괜한 트집인 것 같다. 매사 자기관리가 완벽한 사람들의 행동이 부러워 미루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잘 안 되는 나 자신 때문에 연거푸 한숨이 나온다. 강풍 맞아 헝클어져 있는 모습 같다. 미룬 일들이 나를 갉아대며 지쳐있는 모습으로 비춰주는 것 같았다.

몇 가지를 정리하다 마음을 먹고 메모한 종이를 들고 길을 나섰다. 별스럽다고 여겨지겠지만, 전쟁에 나서는 장군같은 비장한 기분마저 드는 건 왜일까? 해야 될 일들을 정리하고 어디로 먼저 가야될지 머릿속에 발품 견적을 이리저리 재어 보며 순서대로 일을 해결해나갔다. 사실은 많은 시간이 걸리거나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가기가 싫었고, 하기가 싫었던 몇 가지 일들을 해결하고 보니 발품만 팔아도 쉽게 마무리될 일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마무리되니 마음속 돌이 하나, 둘 사라져 저울의 무게는 가벼운 숫자판으로 내려가 있는 듯하다.

몇 가지 일을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왔다. 바쁘다는 이유로 돌보지 못한 식물들이 생기를 잃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꽃이 피어 있을 때는 내 눈길이 한참이나 머물러 있었던 것들이다. 꽃이 진 뒤에는 구석진 자리로 옮겨져 눈에 잘 띄지 않게 되자 물주는 것도 미루었다. 겨우 목숨부지 할 만큼 물을 받아먹고 버텨내고 있는 모양새가 나와 같아 보인다. 미안함과 측은한 마음에 듬뿍 물을 준다. 시들어 말라버린 꽃잎은 떼어내고 처져있는 잎들은 대를 세워 묶어주었다. 한결 깔끔하고 생기 있게 보인다. 가지런히 정리된 화분들을 보며 미룸을 미루는 나를 다시 일깨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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