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옥 수필가
이형옥 수필가

일주일째다. 물들어 가는 산이 보고 싶었던 그 날을 시작으로 벌써 일주일째다. 시원한 바람과 새들의 노랫소리 가득한 숲에서 가을을 느끼고 싶었다. 따뜻한 차를 마시고 햇살에 반짝이는 작은 호수가 보고 싶었다. 마치 사랑을 시작한 여인이 된 듯했다. 함께 가자는 친구의 전화를 받아서일까. 여느 날보다 설렘으로 마음이 바쁜 아침이다.

온 산이 제 색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한데 어우러져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나무들의 모습에 눈이 간다. 잎의 모양도 키의 크기도 어느 것 하나라도 같은 것이 없다. 푸른 그늘을 내어주던 잎들이 숨겨둔 제 색을 찾느라 바빠진 계절이 되고서야 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찬바람을 견디고 온몸으로 햇살을 받던 계절을 함께 지낸 까닭일까. 갈아입은 새 옷의 예쁨과 못남이 없이 산은 여전히 어우러져 하나가 되려고 애쓰는 듯하다. 어깨 맞대고 계절을 즐기는 듯한 그 모습에 가슴 밑바닥이 저릿해 온다. 새들의 노랫소리, 나무와 바람의 속삭임, 구경하는 햇살의 웃음소리로 가득 찬 숲에서의 산책은 늘 즐거움이다. 계절이 바뀌어 가고 있는 지금. 얼마나 많은 애씀이 있어야 저렇게 고운 빛으로 물들어 갈 수 있을까. 공들이지 않고 되는 게 없다는 것을 산은 보여주고 있었다.

나의 푸르렀던 시절을 되돌아본다. 쫓기는 듯한 다급함에 마음은 늘 여유롭지 못했다. 더 빨리 가고 싶어 발 동동거리느라 하늘 한 번 제대로 올려다볼 틈도 없이 지내던 시절이었다.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막막함에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어둡고 긴 터널도 끝이 있다는 것을. 그 끝에는 언제나 햇살이 밝게 비친다는 것을.

꽃들이 피고 지는 몇번의 계절을 보내는 동안, 잠 못 들고 뒤척이던 밤을 견디는 동안 나 역시 단단해져 가고 있었나 보다. 온 마음으로 품어주는 하늘을 보며 차를 마실 여유가 생겼다. 서두르지 않아도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며 스스로 어깨를 토닥여본다. 나 역시 나만의 색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늘어나는 나이의 숫자만큼 마음의 숫자도 늘어나고 있음이 느껴진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작은 숲길. 며칠 혼자 걸었던 길을 오늘은 오랜 친구와 걸어본다. 혼자 걸으며 느꼈던 여유로움도 좋았지만, 친구와 나란히 걷는 다정함도 좋다. 맞댄 어깨의 정겨움에 친구랑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온다. 풋풋한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다.

같은 반이었음에도 서로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우리는 나란히 앉게 된 그네 덕분에 친해졌다. 유난히 책상에 앉아있기가 힘들었던 그날.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빠져나와 그네를 타고 있던 그 시간, 뚜벅뚜벅 그네를 향해 걸어오던 친구. 복잡한 머리를 식히러 왔다며 "너도 그래?"라며 멋졌게 웃던 얼굴이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날을 계기로 다니던 학교와 붙어있던 초등학교에서 종종 그네를 타고 수시로 학교 주변을 산책했다. 많은 게 불안하고 두렵던 그 시절. 함께 나눴던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우리를 이어주고 있는 단단하고 든든한 끈이 됐다.

교복을 벗고서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얼굴엔 세월의 흔적만큼 주름살이 생겼고 흰 머리카락을 숨기느라 수시로 염색을 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 서툴고 어설펐던 시간을 함께 보내서일까. 지나온 시간도, 추억도 둘만의 묵직한 무게감으로 우리는 아직도 서로를 닮아가고 있다. 속내를 다 털어내 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곁에 있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를 이젠 알 것 같다.

돌아오는 길. 따듯한 햇살 한 줌을 주머니에 넣어본다. 시원한 바람은 어깨에 걸치고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소리는 귀에 담아본다. 아직 물들지 못한 나뭇잎 위에 주머니 속 햇살 한 줌을 뿌려 주고 어깨에 결쳐 둔 바람은 친구에게 슬쩍 실어 보내야겠다. 귀에 담아둔 낙엽 밟던 소리는 잘 챙겨다가 우리들의 사진이 들어있는 앨범 속에 넣어 두어야지.

떨어지는 낙엽의 무게만큼 가벼워지는 나무 사이로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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