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광 칼럼위원
윤일광 칼럼위원

조선 후기 과거시험장은 난장이었다. 18세기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봄날 새벽의 과거시험장)'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정조 24년(1800년) 3월에 왕세자 책봉을 기념하는 특별과거가 이틀 동안 창경궁 춘당대에서 열렸는데 수험생이 무려 21만 5417명이었고, 답안지 제출자는 7만1498명이었다. 그렇다면 응시자의 2/3는 응시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시험은 수험번호에 따라 좌석이 지정돼 있지만 당시에는 먼저 앉으면 제자리였다. 시험문제를 내건 현제판(懸題板)이 잘 보이는 앞자리를 차지하는 게 유리했다.

응시생을 가장한 사람들이 시험장 밖에서 밤을 새우며 기다렸다가 새벽에 궐문이 열리면 먼저 들어가려고 몸싸움을 벌였다. 밀고 당기고 싸우는 그야말로 '난리속의 과거시험장' 곧 '난장(亂場)'이 되고 만다. 숙종 12년 명륜당에서 실시된 과거시험장에 먼저 들어오려고 난리를 치다가 8명이 압사하는 사건도 있었다.

본래 난장은 시장이다. 공터에 벌린 일시적인 장터다. 난장은 지역의 특산물이 다량으로 생산되는 시기나, 마을이 새로 생겼을 때 연다. 혹은 흉년·질병·호환·폐촌위기 등 흉액이 발생했을 때 액땜으로 며칠 동안 장을 여는데 이를 '난장 튼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의 기(氣)로 여러 악귀를 꼼짝 못하게 눌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난장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약장수·엿장수·뱀장수·야바위꾼 등이 요란했고, 건달패·소매치기가 설치고, 투전판에서는 싸움소리가, 술집에는 작부들의 노랫소리가 교태롭다. 이런 탓에 '난장'이라고 하면 '여러 사람들이 뒤엉켜 함부로 떠들거나 덤벼 뒤죽박죽이 된 곳'을 뜻한다. 이 말이 다시 무절제·무질서의 의미를 가진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시장은 난장판이 되어야 볼거리도 많고 재미도 있고 장보는 맛도 나지만 과거장이나 정치판이 난장판이 된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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