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혜량 수필가
고혜량 수필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요란한 빗소리 때문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씻어내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비는 서두르고 있었다.

이렇게 내린다면 도저히 멈추지 않을 것 같더니, 아침이 되자 어젯밤 일은 다 잊은 듯이 고요하기 그지없다. 베란다 난간에는 간밤 그렇게 소란을 피웠던 빗방울들이 다소곳이 망울 되어 줄을 서 있다. 비 온 뒤에 펼쳐 놓은 아침의 고요는 적막과는 또다른 들떠있던 세상의 소리들을 숨죽여 아우르는 신비한 침묵이다.

이런 고요함 때문인지 베란다 건너 마주 보이는 산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크게 들린다. 비를 피하느라 고달팠는지, 비 온 후의 산뜻함에 신이 난 것인지 새들의 소리가 고요를 더욱 고요하게 하는 배경음이라도 된 듯하다. 사람의 말소리도 언제나 이렇게 곱게 들리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 매허 바바가 제자들과 나눈 대화를 읽으며 크게 감동 받은 적이 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앞에 있는 상대방에게 조용히 말해도 충분히 그 뜻을 전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큰소리를 지르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들은 화가 나면 서로의 가슴이 멀어졌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 거리만큼 소리를 지르는 것이며, 소리를 질러야만 자기 말이 가닿는다고 여긴다. 그런데 소리를 지를수록 상대방은 더 화가 나고, 그럴수록 둘의 가슴은 더 멀어지는 것이라고. 그러나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말한다.

두 가슴의 거리가 가깝다고 느끼기에 부드럽게 속삭인다. 그래서 서로에게 큰소리로 외칠 필요가 없게 되며, 마침내 이들에게는 아무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 오게 된다.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아무 말이 없어도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 했다.

나는 마치 그의 제자라도 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말에 너무나 공감했기에 가슴 깊숙이 새겨두고 살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해야 할 때는 너무 꼭꼭 숨어버려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마음 어느 구석에 깊숙이 들어앉아 잊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말이 많아지고 큰소리 치고 돌아서면 나의 이 우둔함이 미워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봄기운이 유난히도 싱그럽게 펼쳐지던 어느 날, 나는 결찌의 결혼식장으로 갔다. 거리에는 잔바람에 벚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작은 바람이라도 불면 도로변 갓길 바닥에 떨어져 동개진 꽃잎이 일어섰다 앉기를 반복했다. 예식장건물 입구에서부터 사람들로 붐볐고,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렁이는 꽃비는 아찔하도록 화려한 봄의 절정을 선사하고 있었다.

아직도 내 가슴에 아릿하게 남아있는 결찌의 결혼식이다. 어느 부모인들 자식을 키우며 가슴에 새긴 숱한 사연들이야 없으랴마는, 화촉을 밝히기 위해 단상에 오른 양가의 어머니는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소리 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이렇게 좋은 날 유난스러울 정도의 눈물에 왜 그렇게 우는지 궁금했는데 금방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주례 선생님의 말씀을 옆에 선 수화통역사가 신랑신부에게 전달해 주었다. 어렵게 자식을 키워온 부모의 속내를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 어머니는 눈물로 숨겨둔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례사 다음에는 두 사람이 앞으로 함께 걸어가야 할 서로의 다짐과 언약을 저들만의 언어로 주고받는 순서가 있었다.

어떤 내용인지 짐작으로 알 뿐이지만 그들을 보고 있는 모든 하객들은 알 수 없는 침묵 속에 숙연해졌다. 진심을 표현하는 그들의 손짓과 표정, 눈빛이 세상의 어떤 말보다 감동적이었다. 그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어린 마음의 소리를 느끼고 들었기 때문이다.

수화와 소리말로 진행되었던 이날의 결혼식은 여태껏 내가 보아왔던 어떤 예식보다 엄숙하고 진중했다. 말이 있어 모든 것을 이해하고 감동하는 것만은 아니다.

입을 통해 나오는 말보다 더 진실 된 말. 이날, 아름다운 두 사람의 결혼식은 내 머릿속 어딘가에 불도장을 깊이 새겨둔 것처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어쩌다 말을 많이 하고 돌아오는 날은 속이 허허로웠다. 큰소리를 내어 더 많은 말을 쏟아낸 날은 발걸음이 무겁고 바람이 다 빠져나간 풍선처럼 가슴이 흐느적거리며 신산스러웠다.

이제는 침묵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말이 없이도 신성한 분위기를 만들었던 결찌의 결혼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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